2020년 4월 26일, 정은이는 카페 문을 닫았다. 나무 사이로 슬프도록 파란 하늘이 보였고, 하얀 구름은 왠지 자기들끼리만 포근해 보이는 듯했다.
성수동이 핫플레이스가 되어 가면서 가게 매출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블루보틀까지 생겼으니 말 다했다.) 게다가 건물주는 임대료를 올리려 하고, 자신의 자식들이 우리 카페 자리에서 다른 장사를 하길 원하는 눈치였다. 카페 문을 닫으며 코로나가 퍼지기 전에 닫아 다행이라 말했지만 속상했다. 애써 웃음 지으며, 다행이라 서로 위로하며 가게 정리를 도왔다.
정은이에게 카페는 단순한 일터가 아니었다.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카페 일이었지만, 커피는 어느새 정은이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연결 통로가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용돈을 벌기 위한 작은 일이었지만, 커피의 깊이와 향을 알게 되면서 그녀는 차츰 그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렇게 대학생 정은이에게 카페는 사람을 만나고, 커피 한 잔 속에서 하루의 피로를 잊는 공간이자,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찾게 해 준 작은 우주가 되었다.
정은이는 대학 졸업 후에도 그 카페에서 계속 일했다. 자연스럽게 사장님과도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업계에서 꽤 유명한 커피 전문가였던 사장님은 언제나 새로운 맛을 탐구하며 커피의 세계를 넓혀가던 분이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주변의 친구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영양사를 준비했지만 (정은이는 식품영양학과를 나왔다.) 정은이는 커피를 조금 더 경험해 보는 것으로 삶의 방향을 정했다. 사장님 밑에서 커피에 대해 조금 더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사장님의 카페 이름을 이어받아 다른 지역에 카페를 하나 열었다. 그 카페가 바로 ‘카페마놀린’이다.
커피로 석사를 따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사장님의 권유로 대학원에도 진학했고, 자랑스럽게 석사 학위를 땄다. 커피 강의를 나가고, 바리스타 자격증 심사도 오랬동안 했다. 커피 박람회에서 커피 맛을 보고 이븐 하게 로스팅되었는지 평가하는 커피계의 (나만 인정하긴 하지만) 안성재 셰프가 되었다.
가족들은 그런 정은이가 자랑스러웠다. 밖에서 누군가를 만나 커피 이야기를 할 때면, 빠짐없이 정은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카페를 차리게 되었는지, 카페를 운영하며 강의를 하고 심사를 하는 정은이를 항상 자랑했다.
정은이의 커피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다. 핸드드립은 힘들다며 잘 안 해줄 때도 있었지만 난 정은이에게 핸드드립을 조르곤 했다. 그 따스함과 입안에 감도는 시큼하면서도 고소한 향을 너무 좋아했다.
우리는 모두 그녀의 커피를 즐기면서 정은이의 카페에 점점 더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매주 주말이면 정은이의 카페에서 온 가족이 모이곤 했다. 정은이네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가족이 모여 웃고 떠들며 소소한 시간을 보내는 우리의 아지트였다. 마치 우리만의 비밀 공간처럼, 정은이의 카페는 가족에게 아주 특별한 장소가 되어 갔다.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다양한 기념일을 축하했다. 생일이 되면 카페에 모여 생일 케이크 위의 촛불을 껐다. 연말이 되면 친척들까지 모여 한 해를 마무리하기도 했다. 맞은 편의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빌려 읽기도 했고, 자격증 시험이 있으면 스터디 카페가 되기도 했다. 집에서 심심하게 티브이를 보다 보면 짝꿍은 “정은이네 카페나 갈까?”라고 툭 던지면 아무 말 없이 차를 몰고 카페로 향했다.
아이들에게도 카페는 다른 아이들과 차별화되는 아주 매력적이고 멋진 공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카페를 찾아갔다. 아이들은 “꼬꼬”라고 외치며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장아장 걸으며 카페문을 열었고, 카페 앞에서 눈사람을 만들었다. 카페에는 없는 메뉴인 바나나 우유를 만들어 주었고, 아이들은 다양한 취향에 맞춰 온도와 당도를 조절한 초코 우유를 얻었다.
2020년, 어느 날 문득 그 카페 문을 닫아야 했을 때 정은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동안 가족과 친구, 수많은 손님들과 함께 웃고 울며 만들어 온 추억들이 그 공간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그 공간이 이제 없어진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정은이의 카페를 그리워했다. 큰 아이는 “이제 꼬꼬 카페 못 가?”라며 물었고, 작은 아이는 자동차를 타고 카페 근처 지역으로 갈 때면 “꼬꼬?”라고 말하며 없어진 카페를 가자고 했다. 가족들은 모일 때마다 “정은이가 카페를 다시 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우리에게 정은이의 카페는 단순한 커피숍이 아닌 하나의 작은 세계였다. 커피 향 가득한 공간에서 우리는 울고 웃으며 인생의 여러 순간을 공유했다. 그 공간에서 쌓인 수많은 추억은 여전히 우리 마음에 따뜻하게 남아 있다.
언젠가 정은이의 카페가 다시 열리는 날이 오면, 우리는 또 그곳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아마도 그때는 자라난 아이들이 커피를 배우고, 정은이의 커피 강의를 듣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커피 잔 사이로 피어오르는 향기와 함께, 우리는 여전히 그 따뜻한 공간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웃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매출과 임대료를 걱정하며 심란한 표정을 숨기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그날이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추억이 너무 좋은 쪽으로만 보정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 글을 쓰는 이 순간만큼은 정은이의 카페가 미치도록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