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이의 뇌종양 수술 불가 소식을 듣고 제일 처음 찾아온 건 멍…함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선 슬픔이 밀려왔다. 정은이가 너무 불쌍하고 가여웠다. 정신을 조금 더 차리고 나니 궁금해졌다. 정은이는 뭘 하고 싶을까? 무엇을 좋아하는 걸까? 음식은? 운동은? 여유 시간엔 뭘 하지?
그래서 물어봤다.
"뭘 좋아하니?" 정은이는 "글쎄…"라고 대답하곤 잠깐 침묵했다. 질문을 바꿔봤다.
"지금 일어났고 너에게 딱 하루가 주어졌어. 앞으로 딱 한 시간만 뭘 먹을 수 있어. 뭘 먹을 거야?"
"집에서 먹어? 아니면 나가서?"
"일단 나간다면?"
"나간다면 양념 돼지갈비."
"집이면?"
"집이면… 흠… 삼겹살 구워야지."
정은이는 돼지고기를 좋아하는구나. 몰랐다. 정은이는 대체로 자신의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관심이 없었던 것도 있다.) 돼지고기를 좋아하는지, 소고기를 좋아하는지, 된장을 선호하는지 고추장을 선호하는지 물어보지 않으면 잘 말하지 않는다.
난 먼저 이야기하는 스타일이다. 엄마네 집에 가서 저녁이라도 먹으면 내가 달리기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 요새 농구에 빠져 들어 너무 즐겁다든지, 어제 본 책이나 영화에 대해 내 생각은 어떤지 주저리주저리 떠든다. 너무 내 이야기만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자제하기도 한다. 오죽하면 내 이야기를 하려고 글을 쓰기까지 하겠나.
정은이는 그렇지 않다. 이야기에 참여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많은 말을 하진 않는다. 뚱한 표정을 하고 그냥 앉아 있는 것도 아니다. 웃기도 잘 웃고, 재미있게 받아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먼저 꺼내지는 않는다.
말주변이 없어서 그런가 생각해 봤지만, 말주변이 그렇게 없는 것도 아니고, 말주변과는 상관없이 주저리주저리 잘 떠드는 짝꿍을 생각해 보면 말주변과는 무관한 것 같다.
이유야 어쨌든 정은이는 속에 담긴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다. 그래서 정은이가 남은 시간(조금은 타이트할지도 모르는)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지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가족이라면 예측은 될 터인데… 그 예측도 잘 되지는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기 이야기를 하는 행위에 대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온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까? 있다면 누구나 그럴까? 난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하고 싶은 사람이다. 오히려 내 이야기만 너무 할까 봐 참는 편이다. 그런데 정은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건 그냥 성격 차이일까?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기질의 차이일까? 그런 기질을 타고난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진짜로 선호하는 걸까? 그래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건 그 정도로 충분한 걸까?
아니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는 있지만 두려움 때문에 머뭇거리는 걸까? 내 이야기가 재미없을까 봐, 이 분위기를 망칠까 봐, 누군가가 공감하며 들어주지 않을까 봐 따위의 두려움에 입을 닫기 시작하다가 결국 내 이야기하는 법을 잊어버린 건 아닐까?
나는 내 이야기를 만들고 정리하고 조금은 과장하기도 하고 나에게 의미 없는 건 빼기도 하는 그런 인간이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을 자꾸 이렇게 생각해게 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는 있지만 어떠한 이유로 그 욕구를 풀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ChatGPT에 물어봤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과학적 혹은 심리학적 근거가 있을까?
라는 질문에 ChatGPT는 이렇게 답변했다.
요약해 보면,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는 일반적인 욕구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의미화하고 이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의미 있게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이를 이야기의 형태로 구성한다. 단순히 과거의 경험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들 사이의 관계를 자신의 시각으로 설정하고, 평가하고 판단함으로써 자신에게 더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전개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정은이가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조금 더 밀도 있게 써 나갔으면 좋겠다. 수명이 남들보다 조금은 타이트하게 남아있는 지금 이 상황이 오히려 더 의미 있는 삶으로 나아가기엔 최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당사자는 아니지만 감히 해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조금 더 나누었으면 좋겠다. 조금 더 다정하고 조금 더 세심하고 조금 더 친절한 오빠가 되어야겠다. 지금은 점심을 먹자고 만나면 중간에 이야기가 뚝뚝 끊겨버리고, 잔소리나 늘어놓는 그런 오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