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실한 베짱이 Jul 19. 2019

지하철은 가방을 물고 달렸다.

지하철 문의 기백에 난 주저앉았다.

덥다. 땀이 흐르진 않지만 꿉꿉하다. 양복바지가 자꾸만 몸에 달라붙는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처럼 무릎을 굽힐 때가 문제다. 무릎을 굽히면 바지가 자연스럽게 살짝 올라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뻑뻑하게 잡아당기는 느낌이다. 이러다 바지가 찢어지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울 때도 있다. 여름은 여름이라고 생각하며 짜증을 흘려보내며 집을 나선다.


우리 집은 지하철 역과 가깝다. 이빨 닦는 시간이면 에스컬레이터에 도착한다. 9시까지 회사에 가려면 8시 40분 차가 마지노 선이다. 회사까지 13분. 53분에 광화문에 떨어지면 사무실까지 9시 전에 들어갈 수 있다. 조금 여유 있게 일찍 가는 건 어떠냐고? 안된다. 이건 자존심 문제다. 난 최고 효율을 추구한다. 오늘은 조금 서둘러서 8시 37분 차를 탔다. 50분 도착이다. 효율적이다.


이 시간대의 지하철 항상 사람이 많다. 약간 밀고 들어가야 한다. 서로의 눈길을 애써 피하며 지하철 안으로 들어갔고 문이 닫히길 기다렸다. 평소보다 문과의 거리가 가까웠다. 뒤로 조금 더 가고 싶었다. 


발을 조금 움직여 뒷사람의 발을 살짝 터치했다.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자주 쓰는 방법이다. 보통 이 정도의 터치면 발을 조금 비켜주곤 한다. 그럼 공간이 생기고 난 그 공간을 살짝 파고들 수 있다. 그러나 내 뒷사람은 미동도 없었다. 짜증이 단전에서부터 조금씩 밀고 올라왔다.


지하철 문이 닫혔다. 최대한 문과의 거리를 넓혀야 했다. 허리에 힘을 주어깨를 살짝 뒤로 뺐다. 손에는 백팩을 들고 있었다. 어깨가 뒤로 빠지며 가방이 앞으로 조금 이동한 탓 일까.



가방 끈이 지하철 문에 끼어 버렸다.



지하철 문에 끼어버린 가방끈. 입을 앙 다문 '지하철 문'에게서 절대 놓지 않겠다는 의지와 기백이 엿보인다.



빼내려 시도해봤다. 살짝 힘을 주어 당겨보았다. 조금씩 움직였지만, 사람이 많아 제대로 힘을 줄 수 없었다. 다음 정거장은 3개 노선이 만나는 곳으로 람이 많이 내린다. 그때 힘을 주어 보기로 한다.


사람들이 내렸다. 난 자세를 잡고 힘껏 당겼다. 머리에서 난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려 팬티를 적신다. 조금 움직이긴 하지만 빠질 기세가 아니다. 끈을 조절하는 플라스틱 매듭(?)이 바깥에 있는 듯했다. 온 힘을 다해 당긴다 해도 걸려 나올 수 없는 상황이다. 젠장 제대로 꼈다.


아... 짜증이 밀려온다. 워킹데드의 좀비 떼가 몰려오듯 짜증이 나에게 스멀스멀 걸어온다. 내 뒤에 있던 사람에게 화가 다. 그 사람 얼굴을 쳐다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 젠장. 조금만... 아주 조금만 비켜줬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닌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을 쓴 빅터 프랭클 정신과 박사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그 반응에 성장과 행복이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떠 올리며 난 그 공간에서 차분함을 선택하기로 했다. 난 차분할 자유가 있었다. 이내 난 차분해고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 문 열리는데 뭐가 걱정이야. 생각해 보니 재밌는데 사진이나 찍어 놓자'




다음 정거장에 도착했다. 내 예상과는 달리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내 가방은 여전히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지하철 문에 잡혀 매달려 있는 가방의 모습. 힘겨워 보인다. 애처로운 모습에 지각할 까 두려워 하며 회사에 매달려 있는 내 모습이 보여 안타깝고 짠하다.


아뿔사.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문은 한 동안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문 앞자리를 선호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문에 기대어 광화문까지 가다 보면 방해받지 않고 회사까지 갈 수 있다. 회사가 있는 광화문 에 도착하면 가방을 들고 반대편 문으로 유유히 빠져나가면 되었었다.


어디에서 문이 열리는지 검색해 봤다. 애오개. 광화문과 무려 3 정거장. 애오개 도착 예정시간은 8시 55분. 광화문으로 가는 지하철은 58분. 젠장. 지각이다.


광화문에 도착하기 전 나는 부장님께 카톡을 보냈다.

 

'오늘 지금'이라니 무슨 말이냐. 내가 당황했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그는 내 카톡을 읽었다. 답장은 보내오지 않았다. 러나 내 눈엔 답장이 보이는 듯했다.


"더 일찍 나왔어야지. 소에 일찍 일찍 다니란 말이야!"




그렇게 난 광화문을 떠나보냈다. 서대문을 지나 충정로 애오개에 다다랐다. 내 가방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힘 없이 떨어진 가방. 난 그 가방을 집어들고 회사로 갔다.


난 그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회사로 향했다. 9시를 넘긴 시간이라 주변은 한산했다.


밀고 당기고 치이고 끼고 잡히고 밟히고 화내고 짜증 내는 일 없이 한산한 지하철이 참 좋다.

이런 지하철을 매일 탈 수 있는 날을 상상해 본다.


이전 13화 노동의 가치를 속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