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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Nov 17. 2019

통합 어린이집 부모 참여수업

나는 찐이 아빠다. 찐이는 내 둘째 아들이며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다. 다른 아이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우리 찐이 에게는 커다란 목표가 된다. 다른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도 찐이에게는 몇 달 혹은 몇 년간의 훈련이 되어 버린다. 며칠이면 가능한 에디슨 젓가락 손가락을 끼울 수 있는 고무 링이 달려 있어 편하게 젓가락질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묘한 물건 도 몇 달에 걸쳐 특수 훈련을 받았다. 대소변 가리기도 마찬가지였으며 킥보드 타기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건 다른 아이들에게는 시간이 지나면 별 노력 없이 물론 아이들 나름대로 엄청난 노력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 쉽게 하니 상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성취할 수 있는 일어서기, 걷기, 말하기, 대소변 가리기, 젓가락질 같은 것들이 우리 찐이에게는 커다란 성취라는 거다. 그들보다 많은 훈련과 노력을 통해 이루어낸 쾌거다. 며칠을 노력해서 줄넘기를 배우고 엑스자 넘기를 성공한 것과 같다. 몇 달을 노력해서 아이돌 춤을 마스터한 것과 같다. 몇 년 노력해서 체르니 30을 끝낸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그저 쉽게 생각한다. 우리 아이가 쉽게 쉽게 하는 일이니 그 정도 크기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일로 생각한다. 우리 아이가 젓가락질을 한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물론 의미를 가지라고, 대단한 일로 생각하라고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다. 강요한다고 될 일도 아니니까. 그저 알았으면 싶다. 초등학교 부모 참여 수업에서 아이가 큰 소리로 또박또박 발표하는 모습을 본다.벌써 이만큼 컸구나 대견하다고 느낀다. 이 감정과 내가 우리 찐이가 젓가락직을 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느끼는 감정과 같다. 아이가 수영을 배워 자유형과 배영으로 수영장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본다. 눈물이 핑 돌며 정말 대견하다. 아이는 큰 성취감을 느낀다. 바로 이 느낌이 우리 찐이가 킥보드를 타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을 때의 성취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는. 나는 아이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었나? 아이의 성취를 인정하고 칭찬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나?


찐이는 장애아 통합 어린이집을 다닌다. 한 반에 3명 정도의 장애아동이 일반아동과 함께 생활한다. 장애아동 전담 선생님과 보조교사가 함께 아이들을 돌본다. 통합 어린이집에 대해서는 섭섭함도 많고 할 이야기도 조금 있으니 나중에 약간 배설의 느낌으로 글을 써보려 그 어린이 집에서 부모 참여수업이 있었다. 첫째 딸의 부모 참여수업은 빠짐없이 갔었다. 그러나 둘째의 참여수업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아내는 불안해했다. 작년 참여수업에서 엄마의 얼굴을 보자마자 집에 가자는 무한 루프에 빠졌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뭘 오냐며, 회사나 가라고 했지만 아내의 얼굴에서 시간 되면 기어 나와서 같이 가자라는 글자가 보였다.


중요한 프로젝트가 막바지라 선뜻 가겠다는 말은 못 했다. 그러나 극적으로 그 프로젝트가 오전에 마무리가 되었고 난 오후에 비근로시간 주 52시간 법안이 준 선물 같은 것. 입력해 놓고 딴짓을 하다가 나중에 근무를 채워 넣으면 된다. 상황에 따라 선물이 아닐 수도를 입력하고 극적으로 부모 참여수업에 참여했다.


어린이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내가 예상했던 부모 참여수업의 이미지는 이랬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아이는 운다. 혹은 굉장히 크게 웃는다.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이탈한다.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선생님이 아이의 손목을 잡고 자리에 앉힌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소리를 지그며 다시 자리에게 이탈한다. 손목을 조금 더 세게 잡고 자리에 앉힌다. 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집에 가자고 하며 엄마에게 안긴다. 결국 아이를 데리고 교실 밖을 나온다.


걱정도 많이 되었지만 뭐... 만약 그렇다면 바로 그게 우리 아이지. 내가 창피할 필요는 없잖아. 위로해봤지만 효과는 없었다. 머릿속에 이런 이미지 장표를 여러 개 만들어 놓고 슬라이드 쇼로 무한 재생하며 어린이 집으로 아내와 들어갔다. 아내의 심장 뛰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진 않았지만 나에게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긴장이 된다고 하니 믿기로 했다.


신발을 벗고, 아이의 조그만 신발장 2칸에 내 신발을 나누어 넣어 놓고 슬며시 아이의 교실을 들여다봤다. 아... 찐이다. 맨 앞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다. 옆에는 선생님이 앉아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울며 나오려고 했다. 아내는 자신을 보면 더 울고 집에 가자고 할 거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내심 걱정은 되었지만 그러면 어떠냐며 난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미소도 함께.


나 여기 있다. 잘하고 있다. 그래도 조금 힘들고 외롭다. 그런데 아빠를 봐서 너무 반갑다. 날 보러 와준 거니 열심히 하겠다. 조금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멈추고 수업에 집중하련다. 아이의 울음은 이런 말이 함축되어 있었다.


엄마까지 아이의 시야에 들어왔다. 집에 가지 무한 루프는 발동되지 않았다. 아이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차분했다. 차분하게 수업에 집중했다.


영어 수업이 진행되었고, 아이는 선생님을 바라봤다. 5분에 한 번씩 엄마와 아빠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엄마~~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우리가 손을 흔들어 주면 다시 선생님을 쳐다봤다. 수업을 집중해서 듣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무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뛰어와서 엄마에게 안기고 싶은 이 순간을 얼마나 참고 있을까. 그 모습이 대견했다. 이 대견함이 마음을 울렸고 건조한 내 눈을 촉촉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자신의 이름을 영어로 말하고, 모양을 찾아 칠판에 붙여 완성하는 활동이었다. 찐이에게도 발표를 시킬까? 시키면 할 수 있을까? 뛰쳐나가진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다른 아이들 엄마들이 다 쳐다보고 있는데... 난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심장이 요동 쳤다.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결국 찐이 차례가 되었다. 찐이는 웃으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갔다. 원래 했던 것인 듯 영어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나이를 말했다. 그리고 도형을 찾아 칠판에 붙였다.


결국 난 눈물이 났다. 또르르 흐르는 눈물을 성급히 닦았다. 누가 볼까 두려워 얼른 닦아냈다. 그리고 아이의 얼굴을 쳐다봤다. 입을 앙 다물고 선생님을 쳐다보는 그 얼굴이 보였다.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는 얼굴이 보였다. 그동안의 걱정이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도저히 가늠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 졌다. 외롭지 않기 위해 얼마나 눈치를 보았을지, 하지 않을 행동을 얼마나 많이 되새겼을지 짠한 마음에 가슴이 몽글 몽글 녹아내렸다.


한국말도 잘 못하는데... 영어 수업을 한다고? 어린이 집에서 무슨 영어냐고 생각했지만 물론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찐이에게 의미 없는 일이란 없다는 것을 잊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함께 어떤 수업을 듣는다는 것, 친구들이 좋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 나와서 발표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여준다는 것, 친구들이 자신을 보고 웃고, 박수를 쳐주고 있다는 것. 모든 것이 의미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아이를 성장하게 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작게 보이는 아이의 성취를 대단하다 여기고 칭찬하고 인정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부족했다. 아이의 성장을 가장 믿지 못했던 바로 나였다. 매일매일 성장하고 있는 아이의 감정을, 가슴을 난 보지 못했다. 또 누구를 밀까, 머리를 잡아당길까, 누구에게 피해를 줄까 노심초사하고 걱정만 하고 있었다. 어느새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력을 하고 고난을 이겨내며 성장한 아이의 마음을 난 모르고 있었다.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다.


우리 찐이는 지금 7살이다. 내년에 학교를 가야 하지만 1년 유예를 하기로 했다. 2021년 학교를 가야 한다. 특수학교를 가야 할지 일반학교 통합반을 들어가야 할지 걱정이다. 아직 선택하지 못했다. 일반학교를 가서 수업에 집중할 수 있을지,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닐지, 아이들이 우리 아이를 괴롭히는 건 아닐지, 어떤 사건과 사고에 휘말리는 건 아닐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그러나 이번 어린이집 부모 참여수업에서 한 가지 배웠다. 일단 아이의 성장을 믿기로 했다. 어디까지 성장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성장한 아이가 항상 내 곁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아이의 성장을 믿는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


나도 그렇다. 그래서 난 퇴사하는 척이라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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