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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Jan 22. 2024

시간이 만드는 곰탕

시어머니의 곰탕

사랑하는 아들에게.


엄마가 오늘 너에게 알려주고 싶은 요리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곰탕이야. 기억나니? 엄마가 아들에게 곰탕은 진짜 '곰'을 끓여서 만든 음식이라고 했었잖아. 아들이 곰탕을 너무 좋아하니까 장난을 좀 쳤었지. 실제로 곰탕을 먹고 나면 몸이 뜨끈해지고 힘이 솟으니까 아들은 엄마 말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을 거야. 곰탕은 '곰'으로 만든 음식은 아니지만, 먹고 나면 곰처럼 힘이 나는 음식인 것은 분명해. 뜨끈하고 구수한 국물에 파를 종종 썰어 넣고, 소금을 아주 조금 흩뿌린 다음 막 지은 밥을 말면 아무리 입맛이 없어도 밥 한 그릇을 뚝딱 먹게 되지.


곰탕을 만드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해. 곰탕거리인 양지와 사태를 사서 찬 물에 반나절 담가놔. 핏물이 빠지면 그걸 큰 솥에 넣고 센 불에 계속 끓여. 중간에 기름기와 거품을 걷어주면서 뽀얀 국물이 우러날 때까지 끓여주면 끝이야. 물에 담아두고 끓이기만 하면 된다는 정말 간편한 것 같지? 하지만 곰탕은 레시피는 간단하지만 만드는 방법이 결코 간편하지는 않아. 반나절 핏물을 빼고, 오랫동안 냄비에 국물을 넣고 끓이면서 거품과 기름을 걷어주려면 주방에 하루종일 있어야 하거든. 곰탕을 끓이려면 최소 하루는 꼬박 집안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야.


시간이 필요한 행위라는 점에서 곰탕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엄마의 사랑과 닮았어. 곰탕은 뜨거운 불에 팔팔 끓여지는 단순한 행위를 반복하며 오랜 시간 견디고 있음으로 만들어지지. 엄마도 아이들을 집에서 돌보는 것은 씻기고, 먹이고, 재우는 단순한 것들이지만 내 하루를 꼬박 바쳐서 해야 하는 일이야. 사람에게서 가장 귀중한 자산인 시간을 들여서 곰탕을 끓이고, 아이를 키우지. 고기에 담긴 영양분이 국물에 쏙쏙 빠져나가는 것처럼 엄마도 아이에게 가진 에너지를 바치게 돼. 그러니 곰탕 국물을 그릇 채 들고 마시면 영양분이 가득 전해지는 것처럼 엄마의 사랑을 떠올리면 헛헛한 마음까지 채워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거야.


곰탕과 잘 어울리는 밥도 시간이 있으면 더 맛있게 만들 수 있어. 요즘에는 전기밥솥으로도 간편하게 밥을 지을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쌀을 물어 넣어 30분 가량 불려두면 촉촉하고 찰진 밥을 만들 수 있거든. 이 불리는 과정 없이 지은 밥과 시간을 들여서 만든 밥은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나. 엄마가 한국에서 일을 하며 아들을 돌볼 때는 쌀을 불리기는 커녕 전기밥솥에서 밥을 하는 시간도 없을 때가 많았지. 퇴근하고 오면 밥할 시간이 없어서 햇반을 사용할 때도 있었어. 저녁에 여유있게 밥을 지어 가족들과 나눠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호사로운 일일지 몰라.


엄마가 처음 곰탕의 매력에 빠지게 된 건 아들의 할머니가 주신 곰탕을 먹고 나서야. 당시에 엄마와 아빠는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지. 주변에 가족이나 친척 없이 둘이서 아이를 낳았어. 산부인과에서 막 나왔을 때 할머니가 한 보따리 짐을 들고 집에 찾아오셨어. 그 보따리 안에는 한 끼 식사분량만큼 일일이 포장해 얼려온 곰탕이 가득 들어있었어. 산모가 몸보신하려면 이런 걸 먹어야 한다며 할머니가 직접 끓여서, 식혀서, 담아 오신 음식이었지. 엄마는 당시에 모유수유를 한창 하던 때라 이런 국물 음식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냉동실에서 하나씩 꺼내 먹을 때마다 젖이 도는 기분이었어.


사실 엄마는 그 곰탕을 먹기도 전에 마음이 따뜻해졌었어. 할머니까 곰탕을 담을 비닐봉지가 풀리기 쉽도록 매듭을 지어두는 신 것을 보고 이미 감동했거든. 1인분씩 곰탕을 담으면서 할머니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엄마를 생각해 주신 걸까. 이 비닐을 열 때, 녹일 때, 먹을 때까지의 과정을 다 챙기실 만큼 할머니는 세심한 분이야. 그러고 보면 할머니와 아빠는 참 많이 닮았어. 얼굴도 똑 닮았지만 남을 대할 때 항상 예의 바른 것, 마음이 따뜻하다는 것, 그럼에도 은근히 자존심도 강하고, 꼭 해야 할 말은 똑 부러지게 하는 것도 닮았어. 엄마는 아빠를 좋아하는 만큼 아빠와 닮은 할머니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된 것 같아.


할머니는 가정주부로 사시면서 아빠를 키우셨어. 아빠는 할머니가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었대. 할머니는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것도 즐겨하지 않으셨고, 별 다른 취미도 없으셨대. 그러니 할머니는 아빠가 배고프다고 하면 바로 간식을 챙겨주고, 심심하다고 하면 놀아주고, 아이들과 하루종일 같이 있을 수 있으셨겠지. 학교 마치고 돌아올 때 갑자기 비가 오면 우산을 챙겨 오는 엄마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아빠는 알고 있었을까. 항상 바쁜 부모님 아래에서 자란 엄마는 그런 아빠가 참 부러웠어. 그래서 엄마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흠뻑 받고 자란 아빠를 사랑하게 되었나 봐.


엄마는 요즘 내가 시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 엄마는 지금 하루종일 집에 머물며 아이들을 돌보고, 동시에 곰탕을 끓일 시간이 있어. 한국에 있을 때는 풀타임 회사를 다니면서 아들을 돌보랴 그럴 여유가 없었잖아. 하루종일 육아를 한다는 것은 내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힘든 과정이지만 어찌 보면 다시는 얻지 못할 귀중한 기회일 거야. 뜨근한 곰탕을 마시고 '아 맛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엄마의 이 시간도 뒤돌아 봤을 때 '아 행복했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아들이 곰탕을 격렬하게 먹는 어린 시절 사진을 찾고 싶었는데 못 찾았네. 대신에 비슷한 표정으로 딸기를 먹었던 아들 사진을 남겨둔다. 이때 아들 참 귀여웠지. :)

2018. 산청 딸기 농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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