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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Jan 29. 2024

사과 한 개

사랑하는 아들에게.


오늘은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사과야. 어떤 진수성찬 보다 사과 한 개를 덥석 베어 물어 먹는 간단한 점심이 엄마를 행복하게 해. 사실 엄마는 결혼하기 전까지 요리하는 것도 귀찮아하고, 먹는 것에도 크게 관심이 없었지. 결혼하기 전에는 라면을 혼자 끓여본 적도 없고 커피 한 잔을 타본 적도 없었단다. 어른이 되어 혼자 살면서부터는 사과 한 개를 씻어서 먹는 게 그나마 주방에서 칼을 쓰는 유일한 일이었어. 약속 없고 심심한 주말에는 슥슥 대충 사과를 닦아서 껍질 채 사과를 베어 먹었고, 출근하기 싫은 아침에는 일부러 늦장을 부리며 사과를 작게 조각 내 천천히 먹기도 했었어. 사과는 요리를 귀찮아하는 젊은 시절 엄마의 주린 배를 편안하고 건강하게 채워줘 왔단다.


요즘은 사과 한 개 먹는 것도 사치야. 우리 집에서 엄마만 유일하게 우리 집에서 사과를 좋아하지. 다른 가족들은 과육이 단단한 사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럼에도 엄마는 항상 집에 사과가 한 두 개는 남겨 놔. 엄마를 위한 음식 한 두 개는 냉장고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어야 또 가족들을 위한 요리를 할 수 있는 힘이 나는 법이거든. 다만 어린 여동생을 돌보느라 사과가 집에 있더라도 엄마 먹을 사과를 씻고 자를 여유도 잘 없어.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낮에 먹을 사과를 미리 씻어서 잘라둔단다. 언제라도 배가 고플 때 먹을 수 있게 미리 준비해 두는 거야. 그렇게 엄마는 매일 자신을 돌보는 사치를 부리고 있단다.


사과는 먹지 않고 가만히 보고 있어도 그 모양이 완벽하지. 꼭지에서부터 바닥까지 떨어지는 우아한 곡선들이 모여서 원만한 원을 이루고 있어. 바닥에는 울퉁불퉁한 자연스러운 곡선들이 있어서 어디로 굴러가지 않고 단단하게 서있어. 주방 한구석에 깨끗하게 씻긴 채로 형형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사과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 사과는 바닥에 떨어져 쉽게 물러 죽을 수 있는 가여운 생명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옥죄고 버텨 단단하게 살아남은 하나의 소우주 같기도 하거든. 너무 바쁜 날에는 잘라둔 사과를 다 먹지도 못하고 다시 냉장고에 넣어둘 때도 있어. 하지만 오늘 내가 하루 먹을 사과를 미리 꺼내두었다는 것, 그 완벽한 형태와 화려한 색깔을 내가 보고 행복을 누렸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져.


아이를 낳고 나서 사과 먹는 방법에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사과 껍질'을 대하는 마음가짐이야. 혼자서 사과를 먹을 때는 껍질을 굳이 벗겨낸 적이 없어. 사과 껍질에 섬유질이 더 많아서 껍질과 같이 먹는 것이 더 건강하게 먹는 방법이라고들 하지. 무엇보다 껍질을 벗겨내는 것이 귀찮아서 그냥 먹을 때가 많았어. 하지만 아들과 딸에게 사과를 줄 때는 그 자세가 완전히 달라져. 부득이 바득바득 껍질을 닦아낸 것도 모자라 기어이 껍질을 깎아서 상에 내놓아야 마음에 안심이 들어. 무엇이 엄마를 그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것일까. 껍질 째 먹는 사과라는 포장 봉투의 문구를 믿지 못하고, 껍질에 뭐가 묻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어. 농약의 잔재를 하나 없이 깨끗한 것만 주고 싶다는 욕심이 오히려 사과에 독을 발라. 사과를 한입 깨물 때 의심과 불안이 먼저 씹혀 목에 탁 걸리는 건 엄마의 쓸데없는 완벽주의 때문이겠지.


작년 가을, 엄마는 정말로 완벽한 사과를 먹었어. 우리 가족들이 다 같이 사과 농장에 갔던 거 기억나니? 나무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주렁주렁 나무에 매달린 가을 사과를 보고 감탄하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비가 왔잖아. 사과를 다 따지도 못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집에 돌아가야 했지. 야속하게 내리는 비를 지켜보던 아들은 비를 뚫고 사과를 따라 농장으로 다시 뛰어갔어. 그 모습을 보고 엄마 역시 말릴 수 없겠다 싶어서 그냥 비를 맞으며 사과를 땄지. 아들이 비를 흠뻑 맞고 다시 차 쪽으로 돌아와 자랑스럽게 엄마에게 사과 바구니를 보여줬어. 거기에는 엄마가 특별히 좋아하는 초록색 사과가 가득 들어있었어. 그리고 엄마의 바구니 안에는 아들이 좋아하는 노란 사과가 가득 들어있었지. 우리는 곧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 서로가 좋아하는 사과를 따서 담아왔던 거야. 엄마는 아들이 따온 초록색 사과를 옷에 슥슥 문지른 후에 껍질 채 베어 물었지. 그렇게 생생한 사과의 맛은 처음이었어. 향긋한 사과꽃과 비릿한 빗물 냄새, 아들의 색색 거리던 심호흡이 모두 섞여 엄마는 그렇게 사랑을 맛보았어.


아들이 따 온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 사과, 그리고 내가 담아 온 아들이 좋아하는 노란색 사과.


아들 인생에 그날처럼 갑자기 비가 내린다면 우리 차라리 비를 흠뻑 맞아보자.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바구니에 무엇을 마지막으로 담을지 생각해 봐. 만약에 아들이 바구니에 담긴 것을 나눠주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일 거야. 엄마는 가끔 노예로 살 것이냐 아니면 거지로 살 것이냐와 같은 극단적인 조건을 두고 내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생각해 봐. 아들은 무엇을 선택할 것 같아? 엄마는 아들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지만, 차라리 따뜻한 밥을 먹고 아늑한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는 노예가 낫다고 생각하기도 해. 노예 혹은 거지와 같은 삶의 모양 보다 사실 더 중요한 건 인생의 목적성이 아닐까. 노예로 일해서 버는 돈이 모두 너를 위해서만 쓰인다면 그것은 행복한 삶일까? 혹은 거지로 사는 동안 오직 너의 몸 하나 건사하기만을 바라며 산다면 그것 또한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들이 노예로 살든 거지로 살든 그것과 상관없이 내 바구니에 당장 내가 먹을 사과만 담지 않는 사람이라면 좋겠다. 너의 인생이 어디로 가는 지 그 방향을 모르겠을 때 사과 하나를 껍질 채 한번 베어 물어봐. 그리고 빗속에서 엄마에게 사과를 따주던 6살 소년의 마음이 여전히 니 안에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어. 아들이 모두 잊었다 해도 괜찮아, 엄마가 이 글과 사진으로 꼭 기억하고 있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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