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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Jan 08. 2024

할머니의 물김치   

 사랑하는 아들에게. 무더운 날씨에 입맛이 없어서였을까? 작년 여름, 우리 집 밥상은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는 엄마와 그만 먹겠다는 아들 간의 전쟁터가 되었지. 아들은 미국에 와서 피자, 햄버거 같은 자극적인 패스트푸드의 맛에 빠르게 길들여져 버렸어. 하지만 엄마로서 매일 그런 음식만 먹일 수만도 없었지. 무엇을 먹여야 아들의 입맛을 되돌릴 수 있을까. 고심 끝에 물김치가 생각났어.


 물김치는 나를 키워 주신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야. 엄마는 어릴 때 입이 짧기로 유명했어. 지금 엄마는 아들에게 밥 좀 푹푹 떠서 먹어라는 말을 수시로 하지만 어릴 때의 엄마를 생각하면 이건 좀 우스운 일이야. 사실 엄마는 아들 보다도 훨씬 더 밥을 깨작깨작 먹었었단다. 끼니때마다 엄마의 할머니가 쫓아다니며 밥을 먹여주셨던 것이 아직도 생각나. 그런 엄마에게 물김치는 할머니의 ‘비장의 무기’였어. 할머니가 물김치에 밥을 말아 한입, 두 입 떠먹여 주면 엄마는 그제야 못 이기는 척 밥을 삼켰었어.


 할머니는 맞벌이로 바쁘셨던 부모님을 대신해서 엄마를 키워 주셨어. 엄마의 엄마는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100일도 되지 않아 회사에 다시 돌아가야 했지. 그때 근처에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고 해. 그래서 엄마의 할머니는 평생 살던 전라도 땅끝마을 해남을 미련 없이 등지고 엄마가 있는 부산으로 오셨어. 50대 초반에 손녀딸이 사는 부산에서 새로 인생을 시작한 할머니의 기분은 어땠을까? 할머니는 어린 엄마에게 부산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라고 몇 번이고 말씀하셨어. 손녀딸 덕분에 좋은 곳 산다고 엄마에게 “우리 딸, 우리 딸” 하셨지. 엄마는 할머니가 재밌게 지내시는구나 쉽게 생각했어. 하지만 미국에 와서 엄마가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아보니 그건 즐거움을 찾으려는 할머니의 무던한 노력이었어.


 엄마가 초등학생 무렵에 엄마 가족은 2천 세대가 넘는 큰 아파트 단지에 새로 입주했어.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나 앞만 보고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첫 아파트를 사는 것이 당시의 표준적인 삶이었지. 엄마 가족도 그런 평범한 가정 중 하나였어. 아파트 노인정에는 자식 교육에 목매달아 살다가 그 자식이 또 어린 자식을 낳자 대가 없이 육아를 도와주려고 모여든 젊은 할머니들이 모여 있었어.


 엄마의 할머니도 자주 노인정에 가 계셨지. 할머니는 처음에 노인정에서 말을 한마디도 안 하셨다고 해. 할머니는 평생 전라도에서 사셨고 노인정에는 경상도 할머니들이 모여 있었지. 전라도 사투리 쓴다고 뭐라고 할까 봐 할머니는 처음에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집에 돌아오셨대. 그러다가 한번 노인정에서 할머니들이 노래를 시키길래 구성진 전라도 노래를 한가락 불렀더니 동네 할머니들이 나를 다시 보더라 하고 하루종일 기분 좋아하시던 게 아직도 생각이 나. 비슷한 처지의 남동생 친구 할머니와 친해져서 자주 약수터에서 만나시던 모습, 아파트 뒤편 노는 땅에 고향에서 처럼 작은 밭을 일구어 호박, 상추, 고추 등을 키우시던 모습 등도 기억나. 지금 생각하면 하나같이 할머니가 새로운 터전에 뿌리를 내려 적응하려던 모습들이야. 시간이 흘러 미국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중년의 나이가 다 되어서야 엄마는 할머니의 그런 수고로움을 되짚어 볼 수 있게 되었어.


 엄마는 낯선 미국에서 할머니표 물김치의 맛을 재현하고 싶었어. 처음 만든 물김치는 짜고, 텁텁했어. 할머니 물김치처럼 톡 쏘는 청량감이 없었지.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일주일을 그대로 방치했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 김치가 익자 마법처럼 맛이 훨씬 좋아졌어. 할머니의 깊은 사랑을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은 것처럼, 김치는 시간이 만드는 음식이었던 거야.


 맛이 제대로 들었다 싶었을 때 물김치를 아들에게 선보였어. 아들은 맛있다며 밥을 한 그릇 뚝딱 해치웠지. 엄마는 아들이 어른이 되어 이 물김치를 ‘엄마표 물김치’로 기억하게 될 날을 상상했어. 살다 보면 막막하고 힘든 순간이 찾아오기도 해. 그래서 입맛을 잃어버리는 때도 생기지. 엄마는 이 물김치의 새콤한 맛이 아들의 입맛을 되살릴 음식으로 기억되길 바라. 할머니가 엄마에게 해 주신 것처럼 말이야. 그날을 위해 엄마는 여름 매 끼니마다 할머니에게서 배운 사랑과 시간의 선물, 물김치를 식탁에 올려놓을 거야.





#읊기위한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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