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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Dec 15. 2023

황금비율 카레밥

‘적당히’가 미덕인 너와 나, 그리고 요리




사랑하는 아들아, 엄마가 오늘 알려줄 요리는 황금비율의 카레 밥이야. 아들이 항상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세우고 엄마는 야채와 고기, 밥을 균형 있게 먹일 수 있어서 자주 만드는 그 카레 말이야. 엄마는 카레 4인분을 만들기 위해 감자와 양파 반 개, 소고기는 그 절반의 양을 사용해. 야채는 작은 큐브 모양으로 반듯하게 썰고 소고기는 질긴 부분이 없게 손질해서 얇게 썰지. 소고기를 미리 볶다가 감자와 양파를 넣고 익힌 후에 카레가루와 물을 넣어. 마지막에는 꼭 토마토 소스를 한 스푼 넣어 주는 게 엄마 황금비율 카레의 비법이야. 토마토를 넣으면 소고기 맛과 어울러져서 상큼하면서 깊은 맛이 나. 요리가 완성되면 엄마는 김이 나게 뜨거운 흰 밥에 샛노란 카레를 올려. 밥은 국그릇에 한번 넣었다가 엎어서 둥근 모양이고, 밥과 그릇 가운데쯤 조심스럽게 국자로 퍼 올린 카레가 자리를 잡지. 밥과 섞여서 입 속으로 들어가면 곧 사라질 카레이지만 엄마는 유독 긴장한 상태로 카레를 담아내. 뜨거운 김이 사라지기 전에 그릇을 식탁에 내고, 수저를 가지런하게 옆에 두고 나면 이제 엄마가 할 일은 모두 끝이 나. 엄마는 가족들이 카레를 부지런히 입 속으로 넣는 것만 바라보며 정작 카레를 먹지는 않아.


아들아, 그거 아니? 사실 엄마는 카레를 싫어해. 카레를 떠올리면 주말마다 한 솥 가득 카레를 끓여 놓고 테니스를 치러 갔던 외할머니가 생각난단다. 엄마와 외삼촌이 어른 없이 집에 있어도 될 정도로 컸을 무렵에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한창 테니스에 빠져 계셨어. 맞벌이를 하셨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평일에 마음껏 치지 못했던 테니스를 주말에 몰아 치셨어. 엄마가 토요일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 보면 부모님은 일찍이 나가고 없고, 부엌에는 삼 일을 먹고도 남을 양의 카레가 있었지. 그 많은 카레를 보면서 오랫동안 엄마 아빠가 집에 오지 않겠구나 생각했던 쓸쓸한 기억 때문에 엄마는 지금도 카레가 달갑지 않아.


엄마는 카레의 모양을 싫어 했어. 어릴 때 엄마는 참 예민한 아이였어. 이불 한 귀퉁이가 흐트러져 있으면 푹 잠을 들지 못할 정도로 각이 잡혀 있는 모양을 좋아했지. 그러니 푹 퍼져 있는 카레의 모양을 좋아할 수가 없었을 거야. 하지만 그 시절 사람들은 어린 여자아이의 까탈스러움을 받아줄 만큼 넉넉하지가 않았어. 엄마의 예민함은 존중 받아야 하는 취향이기 보다, 고쳐야 하는 문제점이었지. 그래서 외할머니가 학교 도시락에 카레를 담아주면 엄마는 싫다고 말도 못하고서 는 친구들에게 보여주기가 싫어서 한쪽 구석에 숨어서 카레를 먹었단다. 당시에는 동그란 모양의 돈까스, 네모 반듯한 계란말이, 콩으로 하트를 그려 놓은 아기자기한 친구들의 도시락이 참 부러웠어. 모양 없는 카레나 감자샐러드 같은 도시락 메뉴를 엄마는 그렇게 숨기고 싶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외할머니표 카레에는 재료도 참 다양하게 많이 들어갔지. 외할머니가 손이 좀 크잖아. 카레에는 기본적으로 양파, 감자, 당근은 냉장고에 있는 만큼 가득 들어갔어. 어떤 날에는 소고기 또 어떤 날엔 콩, 옥수수, 양배추가 들어갔지. 정해진 규칙대로 행동하는 걸 좋아했던 엄마는 그런 재료의 변화도 달갑지가 않았어. 외할머니는 김치에 들어간 굴이 맛있다고 하면, 다음번에 기필코 굴을 배추보다 많이 넣어서 배추가 조금 들어간 굴 무침 같은 김치를 만드는 분이었지. 친척들이 외할머니가 만든 피자가 맛있다는 말을 한마디 했다가, 외할머니가 몇 년 동안 계속 간식으로 피자를 만들었던 시절도 있었단다. 그러니 어떤 재료를 넣더라도 강한 향신료 맛으로 덮이는 카레를 얼마나 다양하게 만들었을 지 상상이 가니? 아마 외할머니가 가족들을 사랑하는 만큼 많은 재료가 카레에 들어 갔을 지 몰라. 더 많이 건강해지라고, 더 많이 맛있어지라고 넣은 재료들이 한꺼번에 섞이니 그것은 엄마가 먹기 싫은 카레가 되어버렸어. 하지만 아무도 외할머니표 카레가 맛없다는 말을 하지 못 했어. 간이 안 맞아도 맛이 이상해도 일단 제대로 익기라도 했다면 맛있다고 하는게 어릴 때 엄마가 살던 방식이었어. 외할머니는 항상 바쁘셨지. 일을 하셨고 뒤늦게 공부도 시작 하셨어. 외할아버지도 똑같이 바쁘셨지만 조용한 성격이셨던 것과 달리 외할머니는 사람 만나는 것도 참 좋아하셨지. 테니스 월례대회 뒤풀이나 각종 계모임에 가는 것도 즐겨 하셨어. 그러니 얼마나 항상 시간이 부족하셨을까. 나중에 커서 외할머니 친구에게 들었는데, 외할머니는 학창 시절에도 그렇게 바빴대. 공부도, 운동도, 미술도 잘했던 외할머니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해서 대체 언제 틈을 내서 공부하는 건지 다들 궁금해할 정도였대.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외할머니가 엄마와 외삼촌을 돌보는 것도 나름 최선을 다하는 것임을 어린 엄마는 알고 있었어. 그래서 엄마는 카레가 싫으면서도 외할머니가 엄마를 위해 겨우 할당했을 그 시간이 소중해서 카레를 미안한 마음으로 먹었단다. 외할아버지가 더 주무시는 동안 외할머니는 엄마를 위해 더 일찍 일어나 새벽에 카레를 만드신 거잖아.


카레는 마치 외할머니 그 자체 같기도 했어. 아이들을 건강하게 잘 키우고 싶고 일도 잘하고 싶고 취미활동도 다 잘하고 싶었던 외할머니처럼 카레에는 몸에 좋은 것들이 다 들어가 있었지. 하지만 엄마는 정성 드려 구운 김, 내 입맛에 딱 맞춘 국, 귀여운 메모 한 장이 들어있는 도시락 같은 것들을 바랐어. 커다란 통에 몸에 좋은 재료들을 다 넣고 한꺼번에 끓여버리는 카레가 아니라, 섬세하게 재료를 하나씩 익혀서 조심스럽게 내어놓는 그런 음식 말이야. 그래서 주말에 먹어야 하는 그 많은 카레가 그리 싫었나 봐. 지금도 카레 냄새만 맡고도 쓸쓸해지는 엄마 자신을 보면 당시에 채워지지 않는 마음 때문에 외로워 했던 어린 여자 아이가 보여. 그래서 엄마는 아직도 카레가 짠해. 어릴 때 엄마는 외할머니가 계모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대. 계모는 낳아준 친 엄마가 아니라 새로 생긴 엄마라는 뜻이야. 외할머니가 계모일리가 없는데 왜 그렇게 말했을까. 지금 엄마는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전혀 없지만,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아. 당시에 엄마는 아침 등교 준비할 때 혼자 머리를 꽉 하나로 묶고, 학교 다녀오면 스스로 간식을 찾아 먹으면서 숙제를 하는 야무진 딸이었지. 하지만 사실 엄마는 뒤에서 누군가가 매만져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촘촘하게 땋은 머리에 리본을 달고 학교에 가고 싶었고, 집에 오면 누군가 방금 만들어준 핫도그를 먹고 싶었어. 학교를 마치면 텅 빈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느릿느릿하게 걸어 오면서 엄마는 그런상상 속 엄마 자신과 외할머니 이미지를 만들었던 것 같아.


그런데 참 이상하지. 엄마가 그렇게 카레를 싫어했는데 또 아들에게 카레를 만들어주고 있으니 말이야. 엄마는 외할머니가 만들어주던 카레가 전부라고 믿고 살다가, 20살이 넘어 어른이 된 후로 다양한 카레를 만났어. 인도 카레는 들어간 재료라고는 고기 몇 점 밖에 안 보이는데 진하면서 묵직한 맛이 났어. 일본 카레는 아기자기한 모양에 상큼하고 달콤한 맛이 났지. 카레 소스에 돈까스를 더해 먹는 새로운 음식도 만났어. 그러면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세상 속에서만 살던 어린 소녀가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된 거야.


마산 월영동의 ‘하연’. 엄마가 가장 맛있게 먹은 카레를 팔던 곳이야. 10년 전 딱 한번 갔던 곳이지만 엄마랑 똑같은 이름의 레스토랑이라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지. 그곳은 사장님 혼자 요리하고 운영하는 레스토랑이라 예약을 미리 하고 가야 했어. 엄마는 우연히 신문 기사를 통해 그곳을 알게 돼서 그 근처를 여행하는 김에 들르게 됐어. 공간이 좁아서 저절로 속닥거리며 이야기하게 되고, 정갈하게 담긴 음식들이 예뻐서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들게 되는 곳이었지. 카레에는 야채가 전혀 보이지 않았어. 아마 곱게 갈려 있었던 것 같아. 한 입 떠서 먹으면 새우와 감자가 조화된 감칠맛이 확 퍼지는 정말 오밀조밀 다양한 맛의 카레였어. 조용하게 작은 접시에 반찬을 정성 드려 담아 내는 사장님을 보고 나도 저렇게 요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음식을 먹을 때는 같이 먹는 사람이 누구냐도 참 중요해. 당시에 같이 이 식당에 갔던 사람이 바로 지금 아들의 아빠야. 서울을 떠나 지방 소도시에 신혼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어. 엄마 마음대로 가고 싶은 식당을 예약하고 간 것이었는데 아빠는 언제나처럼 엄마가 무엇을 하든 잘했다고 칭찬부터 해주었지. 작은 식탁에 앉아서 한 입 씩 조심스럽게 카레를 섞어 입에 넣다가, 눈이 마주치면 조용하게 웃었어. 카레를 먹을 때는 서로 거의 머리가 부딪힐 만큼 가까워졌다가, 한 입 먹고 다시 멀어져서 ‘맛있다’고 동시에 이야기 했지. 이 식당이 잊혀지지 않는 건 맛이 아니라 순전히 아빠 때문인 것 같기도 해. 엄마는 수줍음이 많아서 직접 식당을 예약하고 음식이 너무 맛있는데도 식당을 나갈 때까지 사장님께 말 한마디 못 걸었어. 그런데 아빠는 다 먹고 나갈 때 ‘우리 와이프 이름이 여기 식당 이름과 똑같아요’ 라고 갑자기 이야기 했어. 사장님은 자기 이름을 따서 식당 이름을 지었고, 나와 이름이 똑같다며 웃으셨지. 아빠는 그렇게 어디를 가든 엄마를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다정한 사람이야. 그게 고마워서 엄마는 신혼시절 내내 정성스럽게 요리를 하고자 노력 했어. 그때의 마음으로 지금까지 아들에게 요리를 해주고 있는 거야. 엄마는 어릴 때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어딘가 구멍이 있어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우울감이 있었는데, 아빠와 아들과 딸을 만나고 나서 그 구멍을 메워가고 있어. 매일 엄마가 요리를 하는 것도 다 그것에 대한 감사함의 표현이야.


엄마는 올해 만 37살. 한 솥 가득 카레를 만들어 놓고 테니스를 치러 가던 외할머니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어. 딸은 결국 엄마를 닮는다더니 엄마도 그런 걸까. 어릴 때 그렇게 싫어하던 카레를 일주일에 한 번씩은 만들고 있어. 곧 겨울방학이 오면 더 자주 만들지도 몰라. 바쁜 외할머니가 싫었는데 결국 엄마도 워킹맘이 되었지. 미국에 오게되면서 휴직을 하고도 새로운 일을 계속 벌이려는 엄마 자신의 모습은 그때 외할머니와 똑 닮았어. 급하게 요리해야 하면서도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고 싶은 욕심은 버리지 못한 것도 똑같지. 그래서 결국 엄마도 카레를 자주 만들게 되나 봐. 다만 어릴 때 싫어했던 카레의 모습을 닮고 싶지 않아서 항상 긴장한 채로 카레를 만들어. 더 많은 재료를 넣고 싶다는 유혹도 참고, 최대한 보기 좋은 모양으로 그릇에 담으려고 노력해. 카레를 만들 때 마다 아들이 먹기 싫어하는 버섯이나, 익힌 브로콜리 같은 채소를 추가로 넣을까 말까 고민해. 몸에 좋은 재료를 더 많이 넣으면 아들이 더 건강해 질 것 같거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엄마만의 황금비율을 지키려고 다음을 다잡아. 황금비율의 원칙은 우리집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어. 많은 학습지와 책을 사 놓고 억지로 읽으라고 밀어 넣는 것 보다, 아들이 정말 흥미 있어 할 만한 책 한권을 슬쩍 집에 두면 오히려 아들이 더 잘 읽더라. 비싼 교구를 한꺼번에 사는 것 보다 학습지 한 권을 겨우 끝냈을 때 선물로 사주는 장난감 하나를 아들이 더 소중하게 여기더라. 미국에 처음 이사 와서 육즙이 줄줄 흐르는 햄버거와 기름진 감자튀김을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는데, 변변한 가구도 하나 없이 박스 위에 밥과 조미김 하나를 놓고 하하호호 웃으며 먹었더니 비로소 배가 차더라. 많이 먹는 것 보다 즐겁게 먹는 것, 많이 사는 것 보다 알맞은 것을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걸 엄마는 요즘에서야 느껴.


아들은 밥을 맛있게 먹다 가도 가끔 엄마는 왜 먹지 않냐고 물어보지. 그러면 엄마는 먹는 걸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고 답을 해. 아들, 엄마는 정말 그래. 엄마가 정성 드려서 만든 카레를 가족들이 맛있게 먹고 있는 걸 보면 엄마는 어릴 때 외로워하던 엄마 자신에게 이 카레를 먹여주고 있는 느낌이야. 아들이 엄마의 황금비율 카레를 맛있게 먹어주면 어린 시절 엄마도 같이 배가 불러와. 그래서 엄마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카레를 싫어해도 만들고 있는 거야. 아들은 엄마와 달리 카레가 어떤 모양이든 신경을 쓰지 않는 무던한 성격이지. 엄마가 애써 모양 내놓은 카레를 숟가락으로 단숨에 섞어 버리잖아. 더러운 걸 참지 못하는 엄마와 달리 아들은 입가에 음식이 묻으면 손등으로 쓱 닦아 내버리고 엄마를 보고 웃지. 카레밥의 황금비율 같은 건 아들에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엄마가 카레의 황금비율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건 엄마의 어린 시절을 다독여 주는 기도와 같아. 엄마는 자기 몸집 만큼 큰 냄비에 가득 담긴 카레를 묵묵하게 먹던 그 어린 소녀의 옆에 앉아있어 주고 싶어. 다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그런 말 말고, 이것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감사하게 여기라는 그런 말은 삼키고 묵묵히 곁에 있어주고 싶어. 황금비율 카레를 계속 만들다 보면 그 소녀가 배가 불러서 언젠가 다시는 엄마 곁에 오지 않을 것 같아. 그 때 우리 아들이 엄마한테 배운 이 카레를 만들어 줄래? 그러면 엄마는 카레를 정말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요즘에는 엄마의 야채 가득한 밥상이 그리워진다. 그릇이 모자란 엄마 음식.
멍게 비빔밥에 멍게가 이렇게 많이, 도다리쑥국에 쑥이 이렇게 많이!
생일날 미역국은 한사발이 기본, 찰밥에는 내가 좋아하는 밤이 이렇게나 많이 들어있다.
샐러드가 빠지지 않는 엄마 음식.
국물을 좋아하지 않는 내 국그릇에는 건더기만 가득, 국물이 있어야 하는 아빠 국그릇에는 국물도 가득.
엄마가 선물로 준 큰 장미꽃 다발. 한동안 엄마의 사랑 향기를 맡으며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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