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쿠키 굽는 엄마, 돈 벌어오는 엄마

『여자에게 일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by 엠마


IMG_3145.heic
IMG_8021.HEIC
IMG_5224.HEIC
IMG_1646.HEIC
IMG_2213.JPG
IMG_1647.HEIC


쿠키 향이 가득한 오후


책의 한 챕터 제목이 유난히 내 마음을 붙잡았다.
“쿠키 굽는 엄마, 돈 벌어오는 엄마.”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 두 세계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국에서 보낸 3년, 긴 육아휴직의 시간 동안 나는 매일 오후 쿠키를 구웠다.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즈음 반죽을 나눠 오븐에 넣고, 초콜릿이 녹아드는 냄새 속에서 커피 한 잔을 들었다.

그 시간은 참 달콤했다.
바람은 부드럽고,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아이의 웃음이 부엌을 채우면, 나도 그 웃음 안에서 안도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체중계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3kg이 늘어 있었다.
놀랍게도 나는 그 사실을 보고도 웃었다.
‘그래, 지금이 내 인생의 가장 편안한 시기잖아.’


그런데 그 평화는 어딘가 이상했다.
책상 위 노트북의 불이 꺼진 채로 하루가 지나가고 나의 이름이 불리지 않는 세상은 너무 조용했다.
편안했지만 내 안의 어떤 감각은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나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장 값진 일이라 믿고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이건 아이를 위해서야.”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건 어쩌면 내가 세상으로부터 잠시 도망칠 수 있는 가장 품위 있는 변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쉬는 걸까, 멈춘 걸까
Women are constantly being told that it’s simply too difficult to balance work and family,
so if they don’t really ‘have to’ work, it’s better for their families if they stay home.
여성들은 ‘일과 가정을 병행하기엔 너무 힘들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는다.
그래서 정말 ‘일할 필요’가 없다면, 가족을 위해 집에 머무는 것이 낫다고.
— Leslie Bennetts, The Feminine Mistake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나 자신을 향해 물었다.
혹시 나도 그 말 뒤에 숨고 있던 건 아닐까?


여성이 “가정을 위해 일을 그만뒀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끄덕임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이해와 존중, 그리고 안도의 감정이 섞여 있다.
나는 그 부조리한 끄덕임의 온기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어쩌면 나도 그 끄덕임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첫째를 낳고 복직했을 때, 회사의 공기는 낯설었다.

주말부부이던 남편과 함께 있기 위해 서울에서 낯선 도시로 직장을 옮겨 고군분투하던 날,

밤새 아기를 재우고 출근하던 새벽,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울음을 삼킨 적도 있었다.

일과 집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썼지만,
늘 어딘가에 미안했고, 늘 조금은 부족했다.


끈을 놓아버리는 건 생각보다 쉽다.

‘아이를 위해서’라는 말은 모든 선택을 선하게 만든다.
그 말 한마디면 설명이 필요 없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말 뒤에 가려진 건 두려움이다.


다시 ‘복귀’를 앞두고 있는 나는 내가 해야 할 수많은 일들을 떠올린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버겁다.

새로운 것을 익히고, 동료들과 관계를 다시 맺고

무너졌던 나의 전문성을 조금씩 세워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다.


나는 정말 쉬고 있는 걸까, 아니면 멈춰버린 걸까.
그 질문이 매일 내 안에서 메아리쳤다.

경제적 자율성, 나를 지키는 힘
Earning money and being successful not only make women feel great,
but when women sacrifice their financial autonomy by quitting their jobs, they become vulnerable to divorce as well as the potential illness, death, or unemployment of their breadwinner husbands.
돈을 벌고 성공하는 것은 여성에게 성취감을 줄 뿐 아니라,
직장을 그만두어 재정적 자율성을 포기할 때 여성은
이혼, 남편의 병환·사망·실직 등 예기치 못한 위험에 취약해진다.
— Leslie Bennetts


이 문장은 마음을 단단히 때렸다.
나는 한동안 책장을 덮고, 조용히 손을 모았다.
그동안 ‘쉼’이라고 부르던 시간이
어쩌면 나를 조금씩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내가 살던 산호세는 물가가 너무 비쌌다.

아이 한 명을 데이케어에 보내려면 한 달에 3,000달러 가까이 들었다.

웬만한 엄마의 월급은 그대로 사라졌다.

그럴 바엔 전업으로 있는 게 ‘경제적으로’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래서 내 주변에는 일을 그만둔 엄마들이 많았다.

아이를 품에 두고 싶다는 마음, 비용 부담, 그리고 사회적 시선.

그 모든 이유가 정당해 보였다.


하지만 작가 레슬리 베넷츠는 말한다.

“어떻게든 끈을 잡고 있어야 한다.”

그녀는 두 아이를 키우며 커리어를 완전히 놓지 않았다.

재택근무가 가능한 일을 찾아 방향을 틀었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일을 서서히 넓혀갔다.


그 대목을 읽으며 나는 오래 생각했다.

나 역시 어떤 형태로든 일을 놓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 전업으로 지내더라도, 나를 세상과 잇는 끈 하나쯤은 남겨야 한다.

글, 공부, 프로젝트. 어떤 것이든 나를 살아 있게 하는 연결은 필요하다.


균형을 잡기 어렵다고 아예 그 끈을 놓아버리는 건 어리석다.

삶의 한쪽이 무너질 때 다른 한쪽도 함께 기운다.

아이를 돌보는 일과 나 자신을 일으키는 일,

그 두 축은 서로를 지탱하는 뿌리다.


집안일의 가치에 대하여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아쉬움이 남았다.
작가는 ‘집안일’을 다소 폄하하는 듯했다.
그녀는 경제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그 안에서 집안일은 수입을 만들지 못하므로 ‘덜 가치 있는 일’로 여겨졌다.


물론 그녀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여성의 경제적 자율성은 단순한 소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독립성을 지키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반문했다.
'돈이 되지 않는 일은 정말 가치가 없는가?'

집안일은 누군가를 위해 돕는 일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사회는 그 일을 ‘보이지 않는 노동’이라 부른다.
심지어 작가 역시 그것을 '나눠서 빨리 끝내야 할 일' 정도로 표현했다.
현실적이지만 어딘가 씁쓸했다.


경제적 자율성을 갖는 것과 돌봄의 가치를 인정하는 일은 충돌하는 게 아니다.
둘은 함께 가야 한다. 한쪽이 사라질 때, 다른 쪽의 의미도 퇴색한다.


일의 의미를 다시 묻다

일의 균형을 잡는 건 어렵다.
그래서 많은 여성이 아예 그 끈을 놓아버린다.
팽팽한 줄 위에서 흔들리느니, 아예 그 줄을 내려놓는 편이 편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균형이 어렵다고 손을 놓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다.

삶의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도 함께 기운다.

아이를 돌보는 일과 나 자신을 세우는 일은 서로의 균형추다.
하나를 포기하면 결국 둘 다 잃는다.


이제 나는 핑계의 언어를 버리고, 다시 내 언어로 나를 서술하려 한다.
그 선택은 도망이 아니라 방향이고, 멈춤이 아니라 재설계다.


돌봄과 일, 가족과 나 사이의 완벽한 균형은 없을지라도
나는 그 끈을 붙잡으려 한다.
흔들려도, 놓지 않기 위해서.




keyword
이전 01화[프롤로그] 햇빛 아래 비둘기 한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