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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경로 이탈


일요일 저녁.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꿈틀꿈틀 올라왔다. ‘한 시간의 독서로 떨쳐낼 수 없는 불안감은 없다.’라는 문장을 떠올리며 얼른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김성효 선생님의 ‘선생님, 걱정 말아요.’라는 책이었다. 김성효 선생님은 워낙 유명하신 분으로 학급경영 전문가, 장학사, 교감, 에세이 작가, 학급 경영서 작가, 동화 작가 등의 엄청난 부캐를 소유한 분이다. 책을 읽어보니 완벽할 것만 같았던 그분에게도 흑역사가 있었고, 그 흑역사를 견디고 버텨낸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문장은 ‘선생님, 오늘부터는 90점 교사가 되세요.’라는 문장이었다.


월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90점 교사가 되리라고 마음먹고 출근했다. 1교시는 주말 이야기로 시작했다. 주말 이야기를 처음 하는 아이들을 위해 내가 먼저 발표를 시작했다. 

“저는 토요일에 가족들과 함께 카페에 갔습니다. 딸기 맛 음료를 마셨는데 봄을 마신 것처럼 상큼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발표를 들은 아이들은 신난다는 듯이 각자의 주말 이야기를 나누어주었다. 주말에 있었던 일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나서는 나를 쳐다본다. ‘어떤 느낌이었어요?’라고 내가 물어주면 ‘좋은 느낌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들어갔다. 모두 좋은 느낌, 좋은 기분이었단다. 주말에 했던 일은 다 다른데 느낌은 하나라니 혼자 웃음이 났다. 다음은 키도 작고, 손도 작고, 목소리도 작은 은별이 차례다.


“저는 주말에 찌찌방에 다녀왔습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찌찌방이라니. 이건 뭐지? 혹시 PC방 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1학년이 PC방에 가는 것도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대안이 없었다.)

“아, 우리 은별이 주말에 PC방 다녀왔나요?”

“아니. 찌찌방!”

“찌찌방?”

“응. 찌찌방!”


자비라고는 코딱지만큼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한 은별이의 표정 앞에 울고 싶어졌다. 당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큰맘 먹고 PC으로 해석했는데 오답이라니. 그럼 찌찌방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 민망한 발음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다행히 아이들은 모두 문제 삼지 않았지만 잘못하다가는 큰일 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문제가 커지기 전에 수습해야 하는데 도저히 뭐가 떠오르지 않았다. 3초의 침묵이 흘렀다. 나의 동공은 좌우로 흔들렸으며, 아이들은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현기증이 날 것 같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갑자기 현준이가 외쳤다. 

“아! 찜질방!”

순간 현준이의 머리 위 전구가 반짝! 했다. (간절한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CG 효과.) 고요 속의 외침이 날 살렸다. 현준이는 하늘이 나에게 보내 준 천사가 틀림없었다!


후. 맞다. 찜질방이었다! 왜 진작 찜질방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새까맣게 탄 속을 부여잡고 있는데 마스크 속으로 콧물이 스르륵 흘렀다. 점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흘러내리는 그 속도는 마치 남몰래 흘리는 눈물같이 느껴졌다. 마스크 속 콧물을 얼른 닦고 기분 좋게 찜질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은별이 찜질방에서 계란 먹었나요?”

“네. 갈색 계란.”

“계란 먹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좋았습니다.”


겨우 은별이를 들여보내고 나니 질문이 들어왔다.

“근데 선생님. 찜질방이 뭐예요?"

아,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아. 그러니까 목욕탕인데 목욕만 하는 곳은 아니고 목욕하고 나와서 반 팔이랑 반바지로 된 찜질복을 입고 찜질하는 곳이랍니다. 거기서 쉬면서 계란도 먹고, 티브이도 보고, 낮잠도 잘 수 있어요.”


나의 경험을 살려 겨우 대답해 주었더니 애들이 난리가 났다. 선생님의 부족한 설명을 보충하느라고 제각기 부리를 벌린 제비들처럼 입을 쩍쩍 벌리며 설명을 하고 있었다.


소금방은 98도라서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다. 찜질방 옷은 모두 같아서 가족을 잃어버릴 수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아이스 방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는 진짜 아이스가 있는 것은 아니다. 찜질방에서 지루할 때는 엄마 핸드폰을 잠깐 빌려서 게임을 하면 좋다. 찜질방 미역국이 진짜 맛있다. (지난주에 이어 여전한 미역국 사랑.)


아이들은 진지하게 엄청난 찜질방 썰 들을 풀어냈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코로나 이후로 가보지 못했던 찜질방을 이번 주말에는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찜질방이라는 단어가 좀 더 빨리 내게 왔으면 참 좋았을 것을. 혼자 맘고생 많이 했다. 아.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1학년 교실은 매일매일 경로 이탈하지만, 오늘의 경로 이탈은 두고두고 웃을 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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