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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교사의 루틴


1학년이 담임이 된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한 달쯤 지나면 좋은 날이 오겠지’ 했는데 슬프게도 아직도 좋은 날이 도착하지 않았다. 좋은 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그날만 기다리면서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기에 매일 좋은 생각, 좋은 마음으로 나를 토닥였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나만의 루틴이 생겼다. 1학년 교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몇 가지 소소한 루틴을 소개하고자 한다.


1. 1교시는 모두 발표

1교시는 모두 발표 시간으로 운영한다. 국어, 수학, 통합, 창체 과목이 그 무엇이 되든 일단 모두 발표를 원칙으로 한다. 모두 발표는 나와 아이들을 모두 각성(?) 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부족한 결과물, 부족한 발표 실력, 부족한 경청 태도지만 무조건 진행한다. 아이들에게는 일종의 워밍업이며, 나에게는 아이들을 살피는 시간이다.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결코 쉬운 시간은 아니지만 매일 하고 나면 잘 했다 싶은 시간이다. 1교시에 발표 경험을 터(?) 놓으면 그 이후 시간의 발표가 좀 더 수월해진다. 그러나 슬프게도 아이들은 다음날 아침 다시 리셋되어 온다. 그러면 다시 1교시 발표 수업을 진행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리셋에 대처하는 나의 첫 루틴이다.


2. 1교시 쉬는 시간은 꼭 같이

1교시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난리가 난다. 우리 교실의 위치는 복도의 맨 끝이다. 화장실까지 질주하기 딱 좋은 위치다. 쉬는 시간 종이 치면 아이들은 레이싱 경주를 앞둔 스포츠카들처럼 부릉부릉 거린다. 나는 모든 스포츠카의 시동을 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카카오 자전거를 안겨준다. 모두 함께 줄지어 예쁘게 걸어 화장실로 간다. 화장실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린다. 스포츠카가 되고 싶은 카카오 자전거들은 나를 발견하고는 다시 얌전히 줄지어 교실로 들어간다. 사실 2주 정도만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 아이들의 질주가 멈춰지지 않아서 아직도 매일 하고 있는 루틴이다. 1교시 쉬는 시간을 공략(?) 하고 나면 나머지 쉬는 시간도 조금 수월해진다. 부장교사라서 쉬는 시간에 오는 쪽지와 연락도 많지만 다 내려놓고 1교시는 무조건 화장실로 간다. 무서운 스포츠카들이 복도를 점령하기 전에.


3. 5교시 전에는 수분 보충

5교시는 정말 힘들다. 아이들도 힘들어하고 나도 힘에 부친다. 시원한 물을 한잔 들이켜 수분 보충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수분 보충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미스트’다. 최근 친한 언니가 미스트를 선물로 보내줬다. 그녀가 보낸 메시지를 보고 빵! 터졌다.

‘1학년 애들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마다 물 뿌려!’

내 미스트의 용도는 미용 목적이 아니다. 기절한 사람에게 물 한 바지를 마신 사람이 물을 뿜어서 뿌려주는 긴급 처방 같은 용도다. 언니의 선견지명 앞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 최고의 선물이었다. 5교시 전에는 무조건 미스트를 뿌린다. 향기를 품은 수분감에 기분도 좀 나아지고 정신도 좀 차려진다. 5교시 할 힘을 얻게 된다. 혹시 5교시가 힘든 1학년 교사가 있다면 미스트를 추천한다.


4. 아이들이 떠난 교실엔 다정한 음악

아이들이 떠난 교실은 TMI이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그들의 흔적이 나에게 너무나 많은 말을 걸어온다. 오늘 뭘 그렸는지, 뭘 만들었는지, 무슨 색깔의 색연필을 사용했는지, 급식시간엔 어떤 반찬을 먹었는지. 정말 궁금하지 않은데 강제로 나에게 알려준다. 처음에는 TMI가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궁금해하고 있다. 책상과 의사 사이에 작은 몸을 끼워 넣고 5교시를 버텨낸 그 아이들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점점 청소력(?)이 늘어가는 아이들은 대견하고, 여전히 나에게 많은 흔적을 보여주는 아이들은 귀엽다. (이제는 그만 귀여워도 되는데.)


다정한 음악을 틀어놓고 교실 구석구석을 쓸어내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수업의 마무리 시간이다. 그 어떤 감정을 느낄 새도 주지 않는 치열하고도 고독한 1학년 교실은 아이들이 떠나야 비로소 무지갯빛 감정이 펼쳐진다. 다정한 음악 덕분인지 오전 내내 시끌벅적하게 나를 괴롭혔던 아이들의 모습이 영 밉지는 않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다음 날 아이들을 또 만난다. 매일 리셋이 되어 오는 듯하면서도 영 모르지는 않는다. 이제는 나의 루틴을 눈치챈 아이들도 많다. 머뭇거리면서도 모두 발표를 익숙하게 하고, 쉬는 시간엔 화장실에 간다며 줄을 선다. 요란하게 미스트를 뿌리는 나를 보며 그거 뭐냐고 묻지 않고, 미니 빗자루질을 하고 싶은 만큼만 하고 집에 간다.


점토같이 말랑거리는 아이들이다. 내가 만들어주는 대로 잘 따라와 주는 모습이 고맙고 대견하다. 이게 1학년 담임 교사만이 느낄 수 있는 뿌듯함인가 보다.


4월의 뿌듯함, 5월의 뿌듯함, 6월의 뿌듯함이 기대된다. (얘들아, 선생님 기대해도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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