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시 오분에 만나요

by 싱지원

휴대전화 번호 옆에 녹색의 새싹 이모티콘이 보인다면 처음으로 문자를 보냈다는 뜻. 이른바 새싹 청취자의 문자다. 번호에 마우스를 갖다 대면 지금까지 몇 건의 문자를 보냈는지 보이고, 자주 문자를 보낸 이의 번호 옆에는 금색 트로피가 자랑스럽게 자리한다. 하루에 수 백, 수 천 개의 문자가 쏟아지는 여느 방송사의 문자 창과는 다르게 지역의 시사 라디오 프로그램에는 하루에 많으면 서른 개 남짓, 보통 땐 열 대여섯 개 안팎의 문자가 도착한다.


5년간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문자창을 들여다보니 트로피가 부여된 번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외울 수 있다. 가끔은 애청자의 근황이 궁금해질 때도 있다. 하려던 이사는 잘 했는지, 텃밭에 심은 모종들은 싹을 틔웠는지, 시험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 반대로 애청자가 진행자의 컨디션 난조를 금방 포착해 내기도 하는데, 애써 괜찮은 척하는 진행자를 걱정하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조심스레 묻기도 한다. 한 프로그램의 청취자를 ‘00가족’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렇게 서로의 안녕을 바라고, 궁금해하기 때문은 아닐까.


한 번은 방송의 날을 맞아 자주 문자를 보내는 청취자를 만나 주로 어디에서 이 방송을 듣고,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주로 다뤘으면 하는지 등을 묻는 기획을 했다. 그 덕에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기만 했던 애청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었다.


하루 종일 고요한 세 평짜리 경비실에 말동무가 필요해 듣게 됐다는 60세 홍식 님은 딱히 바라는 것은 없다며, 지금처럼 늘 그 자리에 있어주길 바란다고 했고, 일을 하다가 다쳐 집에서 쉬고 있지만 지역 시사 이슈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은 57세 순자 님은 라디오가 곧 친구이고, 사회와 소통하는 창구가 된다면서 앞으로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더 다뤄줬으면 한다고 했다. 또, 거제도 이야기만 나오면 쓴소리를 마다 않는 거제도 캡틴님은 라디오를 듣다 보면 속이 시원해져서 좋다고, 사회에 어두운 면을 더 냉철하게 고발해달라고 당부했다.


큰 스튜디오에 마이크와 나, 단둘만 덩그러니 놓여있다고 느낀 적이 종종 있었는데 이날만큼은 학창 시절 캠프파이어 하던 때처럼 불 앞에 빙 둘러앉아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사이이면서, 동시에 오랜 친구 같은 사이이자, 가족이라 불리는 요상한 관계라는 생각에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애청자들의 목소리가 나오는 부분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집으로 향하던 그 날 저녁 퇴근길을 잊지 못한다.


라디오 제작진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슬픈 말이 있다. ‘백라일티’라고, 백 번 라디오에서 떠드는 것보다 한번 TV 방송을 타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다소 자조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어쩌면 이 말도 옛말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듣고 볼 것이 넘쳐나는 요즘 시대에, 유튜브에 밀리고 팟캐스트에 또한 번 밀려 라디오는 결국 저 구석진 곳에 처박히게 된 건 아닌가 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라디오가, 라디오 중에도 지역의 라디오가 가진 고유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 전국 TV 방송에서 다룰 만큼 크고 중대한 사안은 아니더라도, 전문가가 아니어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의 당사자의 목소리를 담고 충분히 듣는 일을 라디오가 해내고 있다.


사는 게 바빠 얼마간 못 듣다가도 주파수만 맞추면 곧바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 느끼는 반가움. 가까이에 있는 이에게는 오히려 말 못 하는 나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공유하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매체. 때로는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기도 하는 이 매체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오늘도 5시 5분 그 자리에서 마음을 활짝 열고 청취자들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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