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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다스 Jan 22. 2024

챌린지와 강박 사이

#08 도장깨기를 즐기는 이유를 묻는다면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횡단보도를 건너갈 때까지 숨을 참으면 오후엔 기쁜 소식이 올 것이다. 1분 안에 먹고 있던 음식을 다 먹는다면 원하는 일 한 가지를 이룰 수 있다. 나의 챌린지는 그런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 때로는 벌였던 일을 변수 없이 무사히 끝맺는 데까지도 이어진다. 그러니 지금 내 마음속으로 정해놓은 챌린지에 실패한다면 어쩐지 내가 도모했던 큰일에서도 미끄러질 것 같다는 불안을 안게 된다. 이를테면 10km를 무사히 달린다면 기다렸던 연락을 받는다거나 자정이 되기 전까지 단편소설 한 편을 모두 필사한다면 당선 연락이 올 것이라는 그런 허무맹랑하고 의미 없는 미신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생각들을 끊임없이 해대고, 무용한 것들을 이 악물고 완수하며 불안지수를 낮추는 편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최근에 나는 나를 오래 보아온 사람들에게 나이가 들수록 ‘강박’이 심해지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여러 사람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니 나는 요즘 고민스럽다. 내가 무언가를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보통 이런 것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옅어진다던데. 너는 어떻게 더 철두철미해지는 것이냐고. 왜 자꾸 인생의 구간을 정교하게 재단하고 정해버리는 것이냐고. 조금 느슨해질 수는 없겠냐고. 게다가 지난달엔 우연히 봤던 사주풀이에서 현실과 타협하며 사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듣고는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늘 목표를 너무 높게 잡는 데다 진심의 방향이 인간적이기보다는 일적인 것 같다고 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진짜 어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려면, 원하는 목표가 뚜렷할수록 모든 걸 다 손에 넣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 그건 욕심인 것 같아. 그러니 일적인 성공을 원하는데 있어 내가 타인에게 인간적인 모습을 함부로 기대하는 건 틀린 것이지.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어. 세상은 동화가 아닌데.      


  건너편에 도달할 때까지 숨을 참거나, 정해진 거리를 뛸 때까지 쉬지 않고 달린다거나, 한 가지 색의 보도블록을 밟는다거나, 집 안의 물건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습관이다. 늘 정해진 시간대에 동일한 일들을 반복하는 편이 편하다. 인생에 변수를 두지 않는 것. 한편 남들이 생각하기에 무리수를 둔다거나 지나치게 체력을 소모해야 하는 일을 나는 꿋꿋이 해냈다. 해왔다는 표현보다는 해냈다는 것이 더 낫겠다. 타인에게는 늘 열정 가득하거나 적극적인 인물로 보여졌을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이러한 태도를 가지게 된 본질적인 이면에는 매우 수동적인 나약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결정적인 순간에 인간으로서의 중요한 가치를 ‘선택’해야 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한 번쯤은 선택의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거나 유예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내게 주어진 타이밍은 그렇지 않았다. 내게 닥친 운명들이 가혹하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지금껏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왔다고 생각한 이십 대에는 ‘평범한 삶’이라는 것을 간절히 꿈꿔왔다. 사람들은 내가 대단하고 욕심 많은 미래를 꿈꾼다고 착각하곤 하지만 실은 나는 평범하고 안온한 삶을 원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 내 손에 쥐어진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평범한 삶은 가급적이면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최후의 1인을 꼽아야 할 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세상이 빽빽하게 들어찬 박물관 속 풍경이라면 나는 그중에 무채색으로 칠해진 군중이 되고 싶다. 그런데 나는 본질적으로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 가끔 그것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만일 ‘나’라는 물성이 하나가 더 생긴다면 여러분은 어떤 쪽을 택하고 싶은지 궁금하다. 서유미 작가의 단편 「저건 사람도 아니다」에 등장하는 ‘나’의 이야기다. 사람들이 사이보그를 장만한다면 대체로 일을 대신해줄 사람을 찾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일은 인생에서 우선순위가 낮은 가치가 아닐까 싶었다. 정말 중요한 건 그 가치의 폭에 들어간다면 주인공이 되고 싶을 테니까.      


  소설 속에서 ‘나’는 한 차례의 이혼을 경험하고 딸아이가 있다. 양육권은 ‘나’에게 있고 전남편은 최근 재혼 연락을 해왔다. 남편은 양육비를 보내는 문제로도 사사로이 나와 갈등을 빚고 있다. 아이는 점점 내게 애정을 갈구하고, 회사에서는 업무 성과를 내지 못해 불안함과 초조한 마음이 계속된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나’는 강박적으로 일을 처리하기 시작한다. 가끔은 내가 기계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생계가 우선이므로 아이의 결핍을 채워줄 도우미를 알아보던 중, ‘나’는 사람이 아닌 사이보그를 제작할 수 있는 사이트를 알게 된다.      


  인간으로서의 노동력엔 늘 감정이 개입된다. 그렇기 때문에 변수가 난무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력이 감정이 배제된 기술로 대체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나’는 사이보그가 감정이 없기에 위험하다고 생각하면서 감정이 없어서 신뢰가 쌓이는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엔 집안일을 대신해줄 역할로 쓰이던 ‘저것’은 우연한 기회로 회사에 다녀온 이후 내 인생의 중요한 가치였던 ‘커리어’를 대신하게 된다. 저것은 매우 철두철미하다. 실수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것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업무 성과가 나지 않고, 쉽게 지치며 환경과 사회적인 영향에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인생이 점점 헐거워지는 것이다. 나는 점점 인생을 주도해가는 것이 아닌 인생에 끌려가는 사람이 되는 것만 같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인생으로부터 선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      


  새해 첫 달 동안 나는 ‘나’라는 사람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잠을 자는 시간이 부족하니 꿈을 꿀 수조차 없었다. 명료하고 직관적인 판단이 어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오늘 모든 일정으로부터 나는 해방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잠깐 필사를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전날 과식을 했으므로 아침은 건너뛰었고 점심과 저녁으로는 계란과 프로틴음료를 동일하게 먹었다. 그 후엔 잠깐 산책을 했고, 돌아와서 밀려 있던 빨래를 비롯한 집안일을 해결했으며 낮잠을 잤다. 그 후엔 다시 이렇게 글을 썼다. 아마 다음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나는 이런 식의 하루를 보낼 것이다. 인생의 변수가 없는 한 내내 같겠지. 도돌이표처럼 늘 같은 하루를 보내겠지.      


  ‘선택’ 받지 못하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강박적인 하루를 보내다 보면 인생의 변수처럼 스스로 ‘챌린지’를 설정하게 된다. 일주일 한 번은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정기적으로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를 올리며 내가 경험했던 것들을 기록하고, 타인들의 기록을 보며 새로운 자극을 받기 위해 몰두한다. 이것은 노력하는 것이다. 인생에 끌려가지 않고 인생을 끌고 가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그렇지만 챌린지가 더 이상 강박으로 변화하는 건 막아야 할 테니까. 인간이 오래 숨을 쉬지 못하면 결국 물거품이 될 것이다. 어떤 ‘선택’은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는 걸 오늘의 나는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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