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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다스 Apr 08. 2024

꽝은 없으니까 꽉 붙잡아요!

#14 누구도 다치게 할 생각 없으니까


  최근에 머리카락을 싹둑 잘랐다. 이렇게 단발을 해본 것은 작년 여름 이후로 처음이고, 중단발로 다듬었던 여름보다도 더 짧게 똑단발을 한 것은 몇 년 만의 일이다. 머리카락을 자른 이유는 여러가지다. 첫째로는 몇 년간 지루하게 유지해왔던 스타일에 변화를 주고 싶었고, 둘째로는 머리카락을 잘라내듯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집에서는 내가 단발을 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집에서 내 별명은 못난이 인형이다. 어릴적 외갓집에 놓여 있던 세 개의 ‘못난이 인형’이 나의 생김새와 닮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외갓집에 갈 때면 할머니는 나와 못난이 인형을 나란히 세워둔 채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평생을 단발머리만 고수해왔던 엄마는 내가 스스로 머리스타일을 정할 때까지 언제나 똑단발을 해주었다. 그래서 유치원 때의 사진을 보면 머리를 묶은 사진은 많지 않다. 머리를 묶었더라도 얇은 고무줄 밖으로 삐죽빼죽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튀어나와 있다. 단정한 차림새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엄만 단정함보다는 단순함을 추구하는 사람 같았다. 똑단발, 무채색, 여백. 대체로 우리 가족은 그런 성향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맥시멀리스트 동생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단정하고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보다는 안정적인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처음엔 그런 재미없음의 세계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그러한 성정을 물려받았을 거라는 사실이 별로라고 생각했다. 세계의 너비는 점점 증폭되는데 나의 세계는 늘 같은 자리만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만 아직도 내가 자신이 아는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내가 받을 상처를, 감당할 수 없는 성장에 끌려가는 것을 걱정하곤 한다.


  머리카락을 자른 것은 그런 이유에 있어다. 내가 아는 나의 ‘선’을 넘어가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모르는 세계의 저편을 향해 과감하게 나아가보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30대를 ‘파도’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보고 싶었다. 물살을 만들어내며 모래사장 속에 스며들어 음각을 새기고, 바위에 부딪히며 쉴 새 없이 쪼개지고, 때로는 갯벌의 끈적하고 어딘지 모르게 음흉한 속내를 드러내보고도 싶었다. 나답지 않게 막무가내로 나아가보자 싶었다. 그러니까 방랑하는 사람. 열다섯에도 오지 않은 사춘기를 그로부터 15년이 지나서야 몸소 티를 좀 내봐야겠다 싶었다. 예의와 범절에 충실한 첫째니까 하지 말란 건 하지 않았던 말 잘 듣던 과거의 나는 없었다. ‘더이상 누구도 배려하지 말아야지.’ 이것은 올해 내가 다짐한 생각이다.


  나는 받은 건 그대로 돌려주어야 하는 성격이다. 어릴 때부터 그래왔다. 호의를 받으면 호의로, 상처를 받으면 상처로 되갚아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공격성이 없는 척 발톱을 감추지만 실은 상황파악이 민첩한데다 추진력까지 좋아 때로는 ‘너 당해봐라’하는 마음으로 똘똘 뭉쳐 있는 비뚤어진 캐릭터이기도 하다. 꼭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나는 상황과 흐름을 잘 이용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렇게 혼을 내준 인간이 어렷이다. 순끼 작가의 ‘치즈인더트랩’ 속 유정의 캐릭터는 어쩌면 나의 이면과도 닮아있다. 그러니까 나는 실은 승부욕이 강한 것이 아니라 ‘나’의 자존심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한 인간이었다는 말이다. 최근에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실제로도 양보를 잘 해온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나’ 스스로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해서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제멋대로 굴기도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내가 지금껏 의젓한데다 차분함까지 겸비한 ‘성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동의하지 않는다. 낭만주의자보다는 냉소주의자를 동경했지만(여전히 동경하고 있으며 세상은 감성보다는 이성이 더 중시되었으면 나았으리라고 굳건하게 믿고 있다) 나 역시 별 수 없는 인간인가 보다. 너그러움을 익힌다는 것은 ‘받은 것’을 모두 ‘되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음에, 때로는 나의 못난 부분을 들키는 것을 유쾌하게 여길 수 있음에 있는 것 같다.


  얼마 전엔 동생이 내가 즐겨 보던 책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길래 그 옆을 지나가며 ‘손대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동생은 되려 억울하다는 얼굴로 자기는 그곳에 책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발뺌했다. 그때 나는 동생의 까치집 같은 머리 위로 꿀밤을 세게 놔주며 거짓말하지 말라고, 이 누님을 속이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가진 ‘촉’과 ‘감’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동생은 분명 내 책에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제목이 특이했던데다 표지는 누구라도 시선을 끌만한 이미지였으니까. 심지어 동생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이기도 했다. 동생이 그 책을 쳐다보는 건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공격’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되려 동생에게 한 덩이의 당혹스러움과 무안함을 안겨줌으로써 ‘누나‘로서의 자존심과 권위를 세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더이상 조마조마하게 걱정하지 마. 네게 못되게 굴 생각이 나는 추호도 없어.

  지금부턴 두 발 뻗고 푹 자라구. 약속할게.


  오늘 밤엔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해주어야 할 것 같다. 동생의 방에 몰래 들어가 왕꿈틀이 젤리를 삼키는 일도, 괜히 누나랍시고 나서서 혼잡하게 걸려 있는 옷가지를 정리하는 일도, 화장실에 다녀오면 제발 손 좀 씻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일도 그만두어야 겠다. 진짜 ‘파도’가 되는 일은 그런 게 아닐까. 공격적으로 상대를 습격하며 깨지고, 부서지고, 파괴되는 것이 아닌 어쩌면 눈앞의 상대를 힘껏 껴안는 것이 그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여유로움을 품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좋은 꿈을 꾸고, 내일을 더 씩씩하게 꽉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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