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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다스 Apr 01. 2024

부푼 흉터 관찰기

#13 누구도 잘못하지 않은 상처라서 그래

  흉터를 가리기 위해 타투를 새겨 넣은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소매 한쪽을 걷어 올린 그의 팔에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읽어낼 수 없는 영단어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멜로 영화 속 대사를 변주한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 나는 대사고 뭐고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상처, 그러니까 흉터에 온 신경이 쏠렸다. 함부로 사람을 판단했다고 생각했다. 첫째로 나는 (귀공자처럼 곱게만 자란듯한) 그의 몸에 흉터가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고, 두 번째로는 이전에도 그의 타투를 우연히 본 적이 있으나 나는 그것 하나만으로 그가 과시욕과 허영이 넘치는 별로인 사람일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종종 내게 보여준 속 깊은 이야기를 통해 진중한 듯 보였지만 그 타투 하나 때문에 (그리고 친밀감을 느낄수록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던 얄팍한 유머감각 때문에) 나는 그가 실은 가벼운 사람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흉터가 있어요? 내 물음에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타투 위쪽의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정말로 그곳에 옅은 실금처럼 길고 깊은 흉터가 있었다. 흉터가 있다고, 어릴 적에 다친 적이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영영 몰랐겠지. 어릴 때 멋모르고 시골 동네를 굴러다니다 경운기 끝에 매달린 철사가 어린 피부를 파고들어 생겨 난 상처라고.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내버려 두었는데 자라면서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되었다고. 굽어지는 팔 안쪽에 하얗게 새살이 돋아 있던 그 흉터 위로 손끝을 갖다 대면 도드라진 결이 고스란히 만져질 것 같았다. 실제로도 만져보고 싶었는데 그건 너무 실례일 것 같아 나는 가만히 그 흉터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이야기를 하는 내내 침착하고 담담한 어조를 유지했으나 무심결에 자꾸만 상처를 만지작거렸다. 막내 주제에 마음이 단단한 줄 알았더니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구나.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내게도 그런 상처가 있다. 가장 최근에 생긴 것은 왼쪽 무릎 위에 있는 부푼 흉터다. 여름 동안 나는 제주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는데 첫날 멋모르고 온종일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다 우르르쾅쾅 넘어져 생긴 상처다. 밤까지 자전거를 타게 될 줄 모르고 무법자처럼 도로변을 달리다 울퉁불퉁한 길을 견디지 못하고 훅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턱밑부터 손바닥, 무릎과 종아리에서 주르륵 피가 흘렀다. 대부분의 상처는 연고를 바르지 않아도 일주일이면 나았는데 유독 무릎에 난 상처가 자주 덧났다. 욱신거리는 고통은 물론이요, 보기 싫은 색으로 착색이 되기까지 했다. 몸을 씻을 때마다 무릎을 마주 보아야 했고, 무릎을 볼 때마다 넘어지던 순간을 생각했으며, 넘어질 때마다 제주를 떠올렸다.


  어찌나 날씨가 변화무쌍하던지.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이 마치 분위기에 휩쓸려 마음을 주고 도망가 버리는 청둥오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는 햇빛이 유독 강렬해 크롭탑만 입어도 땀이 줄줄 흘렀는데 해가 진 이후로는 급격히 쌀쌀해졌다. 다음날부터 퍼붓듯 비가 쏟아졌으므로 습도가 제법 높았지. 길은 울퉁불퉁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무서웠는데 동생 새끼가 자꾸만 페달을 빨리 밟으라고 광광 거리길래 나중에는 머리가 텅 빈 채로 달렸어. 아니 무엇에도 통제받지 않고 자유롭게 쌩쌩 달리던 자극을 과도하게 즐겼던 것인지도. 그러다 쾅, 하고 넘어진 거야. 잘 모르는 상태로 조급하게 달려서. 그 상처는 이제 흉터로 남았다. 흉터로 남을 만도 했다. 첫날 그렇게 무릎을 깨 먹고 둘째 날부터 숙소에서 얻은 밴드와 연고만 대충 바른 채 다리를 절뚝거리며 독하게 이를 악물고는 바득바득 성산일출봉도 오르고, 입산이 절반은 통제된 한라산도 부득부득 비를 맞으며 올랐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해 폭풍우처럼 몰아치던 비도 흠뻑 맞았지. 서울로 올라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무릎은 뜨겁게 달아오르며 나보고 들으라는 듯 소리를 질러댔다. ‘야, 너 여기 상처 있다!’ 하고. 그때마다 나는 무릎 위로 동그랗게 주먹을 말아 올리곤 했는데, 그제야 무서워져 상처를 직접 만지지는 못하겠고 아픈 고통은 몇 날 며칠은 사라지지 않아서 그저 빨리 아물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스스로 낫지 않고서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가을 동안 나는 종종 잠들기 전 이부자리에 누워 그때 생겨난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그때의 일에 대해 골몰해 있곤 했다. 이러다 흉터가 되겠는데. 꾸준하게 새살 돋는 연고를 발라주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크게 넘어졌던 것 같다. 그때 내 다리는 무릎뿐만 아니라 한쪽 종아리 전체에 피멍이 크게 들어 난리도 아니었으므로 심각했지. 엄만 내내 나보고 병원에 가 꿰매는 것이 좋겠다고 잔소리를 해댔는데 이 정도로 무슨 병원을……하며 머리만 긁적이다 겨울이 찾아오며 이래저래 바쁘고 여유가 없어 그것을 돌볼 겨를도 없이 시간이 너무 지나 버렸다. 그동안 상처는 무럭무럭 자라 부푼 흉터가 되어버렸다. 연분홍빛으로 성글게 엮여 버린 흉터는 이제 내 몸의 일부. 흉터에 담긴 사연 역시 내 인생의 일부가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상처를 지우고 싶다거나 내 몸에 더 큰 상처를 내 가리고 멋스럽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본래 반바지를 즐겨 입는 편도 아닌 데다 내 무릎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도 없으니까. 내 무릎을 볼 사람은 유일하게 함께 목욕탕에 가는 엄마뿐이다. 그 사람의 타투를 생각하다 보면 내 무릎에 난 흉터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남들은 쉽게 눈치채지 못하지만 오직 나만이 의식하며 가리고 싶은 상처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것이 내게도 있지. 나 지금 여기 상처가 있다고. 이게 원래 여기 있었던 게 아니라, 내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겪게 되어 살아오는 내내 성가신 장애물이 되었다고 떠들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계속계속 반복해서 떠들어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또, 또 꺼내고 싶은 그런 이야기가 누구에게나 있지.


  흉터를 계속해서 괴롭혀도 되는 걸까.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지금쯤 어디서 뭐하고 지내고 있을까.  


  최근에 나는 생판 모르는 남들을 아주 많이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빌런이 되었다. 어느 모임에서는 초면에 나보다 열 살도 더 많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말을 놓자고 떼를 썼고, 또 어느 모임에선 내가 보기보다 나이가 많다고 우기거나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순진하거나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 박박 우겨댔으며, 또 어느 모임에선 처음 보는 남자에게 다짜고짜 잘 생겼다는 둥 번호를 달라는 둥 그런 일들도 벌였지. (그리고 최근에 나는 ‘남미새’라는 충격적인 용어를 알게 되었다) 그러다 가끔 다들 술에 취해 말수가 적어질 즈음에 거짓이 아닌 진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실은 말이야, 내가 이런 사람인데……. 내가 이런 상처가 있는데……. 너네들 아냐, 내가 왜 이러는지. 어차피 다시는 안 볼 사람들이니까,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당황할 만한 제대로 된 악당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얻은, 내 생에는 있지 않을 경험들을 나의 글, 나의 작품에 생생하게 녹이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흉터는 자꾸만 부풀었고 유일하게 나를 떠나지 않고 내 곁에 남아 함께 울고 웃는 물성이자 기록이 되었다.


  이젠 정말 겨울이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깊어질수록 인연이 겹치는 사람들이 자꾸만 생겨난다. 두 번, 세 번, 심지어는 정말 우연히 다섯 번을 마주한 사람도 생겼다. 그래서 나는 점점 원래의 성정대로 재미없는 인간이 되어간다. 앞으로 얼마나 더 솔직해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이젠 나를 들여다보는 일을 이곳에서 투명하게 고백하는 건 쉽지 않을 듯하다. 내가 아닌 것처럼 구는 장난도 그만둬야 할 것 같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 글이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나누게 될 가장 밉고 모난 글이 되겠지. 아는 사람이 늘어갈수록 우리는 더 짙은 가면을 쓰게 될 테니까. 그러고 보니 부푼 흉터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진다는 글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 숨을 조금 더 천천히 뱉어본다. 다시 한번 부푼 흉터에 손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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