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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주 Jul 15. 2024

닿은 마음이 닳아서 결국 달아나 버린 것 같아

#광주향교

연애를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뭘까? 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타이밍’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랑하지 않더라도 연애는 할 수 있고, 연애를 시작하기 이전에 사랑에 빠져버리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어찌 됐건 서로가 서로에 대한 확신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은 쉽지 않지. 내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는 순간 이미 타이밍이 어긋나 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사랑담이 흥미로운 이유는 언제나 타이밍이 맞지 않기 때문이고, 연애가 재밌는 이유는 타이밍이 맞았다는 운명론에 기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이밍은 중요하다.


  그러나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해서 성급하게 과도한 플러팅을 하거나,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쉽게 응수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첫째로 내게 호감을 표하는 사람으로부터 주도권을 뺏기지 않기 위함이며, 상대로부터 신뢰자산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첫 인상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여지를 줄 만한 행동을 하는 것을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실패는 순간의 분위기에 휩쓸렸을 때 이루어진다. 그 또한 어긋난 타이밍이라 생각하는 편이다.



  오래전 읽었던 책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을 읽고 난 후 정은궐 작가의 팬이 되었다. 정은궐 작가의 모든 책을 읽었다. 그의 책에는 단순히 남녀의 사랑 이야기만 담긴 것이 아닌 당시의 역사와 알지 못했던 시구들, 그리고 인간 사회의 권력과 구조가 담겨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그 배경에 대해 상상하게 되는데, 드라마로 재탄생된 <성균관 스캔들>을 본 이후 ‘향교’라는 공간을 매력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향교는 교육기관으로, 일종의 대학교와 비슷한 개념이다. 향교에서 유생들이 보냈던 시간들은 그야말로 청춘물 같았다. 특히나 한 여름에 향교를 방문하는 걸 좋아했다. 몇 년 뒤 나는 한 여름의 전주에서 향교를 가장 먼저 찾기도 했다.


  그런데 광주에도 향교가 있다는 게 아닌가. 전날 방문했을 때에는 아슬아슬하게 폐장시간 이후에 도착해 문 앞에서 아쉬움을 푹푹 토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선엽과 정원을 재촉하며 부산을 떨었다. 다음에 또 올 수도 있겠지만, 왠지 이번이 광주를 방문하는 마지막이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초봄이라 그런지 향교는 입구에서부터 벚나무가 소란스럽게 피어 있었다. 길가에는 떨어진 꽃잎이 하얀 진주처럼 떨어져 있었다. 향교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이상하게도 마음속에서 싱그러움이 피어났다. 나만 그런 걸 느끼고 있나 싶어 선엽과 정원을 바라보니 모두들 설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향교라 하면 대단한 게 있을 것 같지만 실은 유생들이 머물던 숙소와 강의실이 전부다. 안쪽으로 들어와 내부를 둘러보는데 문화해설사분이 다가와 설명을 듣겠느냐고 말을 걸어왔다.


  “좋아요!”


  낯을 가리는 I인 선엽과 정원과 다르게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문화해설사님의 옆에 섰다. 향교의 역사와 배치된 구조물들에 대한 이야기. 이전에 다른 향교에 방문했을 때에는 만나지 못했던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건축물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 똑같은 기둥인 줄 알았건만 동쪽에 있느냐, 서쪽에 있느냐만으로도 둥글고 큰 기둥인지, 얇고 각진 기둥인지 나뉘었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으니 신이 난 해설사님이 갑자기 내 팔짱을 꼈다.


  “너무 귀여운 아가씨들이네. 꼭 우리 딸 같아서요.”

  “아...! 감사합니다!”

  “위쪽으로 올라가면 광주공원이 있어요. 내가 그쪽도 설명을 좀 해줄 수 있는데, 여기엔 풍수지리적인 이야기가 숨겨져 있답니다. 내 연애담도 들려줄게요.”
   “오오...! 좋아요!”



  그렇게 해설사님과 팔짱을 끼고 향교의 문을 나와 광주공원으로 향했다. 해설사님에게 들었던 역사적인 이야기, 그리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공원 한가운데에 비둘기를 한 무더기로 풀었다는 이야기. 어릴 땐 아무것도 모르고 남편과 솜사탕을 뜯어먹으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는 이야기. 지반이 약해 거북이 모양의 꼬리를 놔주었더니 거짓말처럼 지반이 무너지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 그날 들었던 모든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 같았다. 특히나 해설사님이 남편을 만난 이야기가 더더욱.



  여전히 사랑에 대해 생각하면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마음을 알고도 서툴고 미숙한 태도로 놓쳐버린 사람이 생각날 때가 있고, 내가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했을 때 망설이던 사람이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을 때 그제야 내게 관심을 주어 마음이 좋지 못했던 적도 있었으며, 타이밍을 잘 맞췄다고 생각했더라도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놓아버려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이번 사랑은 아마도 타이밍의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지나치게 신중했던 것이 나의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에 대해 잘 몰라서, 잘한다고 애쓰던 것이 여전히 서툴러 그 자체만으로 부담이 되었는지도.


  그래서 그 사람을 생각하면 ‘타이밍’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조금만 더 늦게 만났다면 다른 결말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내가 너무 미성숙할 때 알게 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엽과 정원의 이야기도 결국은 타이밍의 문제 아니었을까. 임정원이 수많은 이들과 연애를 했더라도 결국은 신해준과 타이밍이 맞았기 때문일 것이고, 선엽은 지우와 타이밍이 맞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인연들은 애쓰고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사랑이 참 어렵지. 운동과 공부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데, 사랑은 알면 알수록 참 모르겠다.



  어떤 마음은 닿을 때마다 닳아 없어지는 것 같다. 때로 여행도 짝사랑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지를 알면 알수록, 내 흔적이 닿을수록 금방 질려버리거나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한 마음이 닳아 없어지는 것. 시간 앞에 모든 속성은 늙고, 낡는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닳은 마음으로도 사랑의 속성을 지속하려 헤매는 이유는 한 때의 잊지 못했던 순간들, 닳을수록 선명해지는 과거의 기억에 기대어 다음 여행을 꿈꿀 수 있는 게 아닐까.



  한 겨울에 가려던 수업을 미루고, 모든 일정을 중단한 채 달리던 열차에서 내렸던 기억이 있다. 중요한 약속을 코앞에 두고 건물 계단에 앉아 약속을 취소해 가며 긴긴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어떤 마음이 예뻐서 웃었고, 어떤 마음이 아파서 울었던 기억이 있다. 다른 기억은 이제 모두 지워내려 한다. 여행을 떠나며 나는 누군가의 명함을 제 자리에 돌려주고 왔다. 아마도 그 편이 좋겠지.



  3일간의 여행이 끝났다. 기차를 타고 올라가는 길에 정원은 해준과 내내 통화를 했고, 해준은 정원이 산 빵을 나눠 먹겠다며 서울역까지 온다고 했다. 선엽은 창밖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생각에 잠겼다. 서울역에 내렸을 때 선엽은 내게 소개팅을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길을 잃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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