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그리웠다. 아이들과 집안에서 복작대고 있는 지금 불과 얼마 전의 일상이 그리웠다.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바깥세상과 부대끼던 소박한 보통날이 한없이 그리웠다.
나갈 때마다 마스크 쓰고, 들어오면 빠득빠득 손 씻는 게 일상인 지금. 상상도 못 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현실이 아직도 낯설다. 날이 좋은 주말이면 아이들과 나들이 가던 게 생각난다. 한강 망원지구 놀이터에서 텐트 치고 놀다 편의점에서 라면 끓여 먹던 일, 오션월드 유수풀에서 아이와 둥둥 떠다녔던 일,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롯데몰에서 맛있는 거 먹겠다고 아이들과 줄 섰던 일, 극장에서 딸아이와 팝콘을 한 움큼 집어먹으며 겨울왕국을 봤던 일. 어디 가정뿐이랴. 어린이집에선 한 달에 한번 숲 체험을 갔고, 공연을 봤고, 소풍을 갔다. 아이는 그때마다 자기 전에 들떴고, 아침엔 두 팔을 힘차게 내두르며 어린이집을 향했다. "엄마 잘 갔다 올게"하며 함박웃음을 짓던 아이.
코로나가 번지던 2020년 2월. 어린이집은 모든 바깥 활동을 전면 중단했다. 글을 쓰는 2021년 2월 1일까지도 말이다. 등원 후 아이들은 어린이집 안에서만 활동했고, 놀았고, 공부했다. 코로나 대유행일 때는 그나마 진행되던 체육활동, 오감 활동도 중단되며 긴급 보육 체제가 가동됐다. 돌봄이 가능한 아이들은 가정보육을 했고, 맞벌이 가정은 다른 방도가 없어 긴급 보육을 신청했다.
난 아이들을 돌 볼 수 있으므로 가정보육을 했다. 가정보육이 장기화될 때면 어린이집의 역할을 뼈아프게 깨닫는다. 별생각 없이 보내던 어린이집이 아이에게도 내게도 이렇게 큰 지지대였다니. 어린이집에서는 보육 기능뿐만 아니라, 돌아다니며 식사하지 않기, 책상 위로 올라가서 장난치지 않기, 친구 때리지 않기와 같은 전반적인 예절과 사회 규범도 지도한다. 집에서 부모가 알려주는 것과는 다르다. 어린이집에서는 친구와 관계 맺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기회와 경험을 통해 아이는 온몸으로 습득한다.
이 시간의 부재는 아이들과 부모에게 혼란을 야기했다. 가정보육을 계속하다 보면 살림에 육아에 지친 엄마는 나가떨어진다. 정신도 체력도 탈탈 털린 엄마에겐 아이들을 제대로 돌본다는 게 버겁다. 잠깐의 휴식을 위해 TV를 틀어준다는 게 어느새 온종일이다. 내가 그랬다. 얼마 전 가정보육을 2달 했다. 정말 과장 안 하고 날뛰는 야수가 될 뻔했다. 아이와 더는 투닥거리기 싫었다. 결국 나는 가정보육 3주 차에 두 손 두발 들며 마음을 내려놨다.
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만 포기하면 하루가 평탄히 흘러간다는 걸. 지적과 잔소리를 하기보단 못 본 척 안 들은 척했다. 평화를 위해 분쟁보단 침묵을 선택한 것이다. '아이들 보호만 잘하면 되는 거 아냐?!'라는 생각을 했고, 수많은 하루를 TV를 틀어주며 연명했음을 고백한다. 당연히 아이에게 자리 잡던 습관과 규범, 생활리듬은 무너졌다. 하루 한번 먹던 간식은 수시로 먹었고, TV도 원 없이 봤다. 어차피 내일도 집에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뭐 어떤가?! 순탄한 하루가 이어진다면야... 그렇지 않았다면 하루가 1년 같았던 두 달간의 가정보육을 버텨 낼 수 없었을 거다.
이 와중에 초등학교 온라인 교육을 서포트한 부모들은 어땠을까 싶다. 그걸 생각하면 첫째가 7살이었다는 게 더없이 고맙다. 주변에선 온라인 교육의 문제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중에서도 온라인 수업에 비협조적인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출석만 하고 드러누워 게임하는 아이, 수업 중에 라면 먹는 아이, 늦잠 자서 참여 안 하는 아이. 교사는 화면 속 아이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의 한계로 스트레스받았고, 부모는 그런 아이를 채근하며 챙기느라 힘겨워했다.
교육이란 지식 습득만이 아니다. 신체적 성장, 정서적 발달, 사회성의 발달을 조화롭게 하여, 넓은 교양과 건전한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이건 온라인 수업으론 한계가 있다. 그저 화면만 보는 것으론 인간으로서의 덕목과 사람과의 정서를 실질적으로 배우긴 어렵다. 아이들은 친구와 같은 공간에서 기회와 경험을 나누고 뒹굴면서 여러 가지를 대처하며 배워야 한다. 그 과정에서 선생님에게 바른 행동과 잘못된 행동을 지도받으며 전인적 성장을 해나가야 한다. 전인적 성장이라는 게 뻔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균형 있는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모에게도 학교 역할은 중요하다.
일하는 부모는 아이들을 믿고 맡기며 맘 편히 돈을 벌어야 하고, 전업주부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곤 콧노래 부르며 장도 보고 청소도 하며 본인의 일상을 보내야 한다. 이 생활이 굴러가기 위해선 학교라는 단단한 지지대가 받쳐줘야 한다. 부모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유치원에 학교에 보낼 수 없다면 모든 게 깡그리 무너진다는 걸 부모들은 코로나 사태로 뼈아프게 깨달았고. 그 소중함도 여실히 느꼈다.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에서는 버크와 토크빌의 "값진 공포 salutary feat"에 대해 이야기한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에게 집단적으로 두려운 순간이 닥치면 이는 강한 충격이 되어 사람들을 깨우고, 생생히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가 세상을 엄습한 지금 딱 들어맞는 말이다.
코로나는 전 세계에 강펀치를 날렸다. 강펀치를 무자비하게 맞을수록 우리 피부는 찢이겼고, 피가 났고, 급기야 뼈가 으스러졌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코로나는 우리를 결박했다. 주위를 둘러볼 틈도 없이 앞만 보며 내달리던 우리는 피떡이 되고 결박되고서야 멈췄다. 사람들은 대체 내가 왜 피떡이 되도록 맞고 결박당해야 하는지 분노했고, 절망했다. 제발 풀어달라고 신음하고 절규했다. 하루 이틀이 아닌 1년 동안 겪으며 사람들은 깨달았다.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만나고 싶으면 만나고, 바깥세상과 부대끼던 소박한 보통날의 소중함을. 그건 눈부신 축복이었다. 마스크와 열체크 없이 어디든 들어가고, 여행 가고, 먹고 마시며 즐기던 삶의 생생함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영롱한 축복인 것이다. 잃어봐야 소중함을 깨닫는다. 이 기회를 빌어 영롱한 보통날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우린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각성하는 시간이 되었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