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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Jul 16. 2019

대한민국 기자를 분류하는 이진법

'00뉴스' 없이는 기사를 쓸 수 없는 기자들

우리나라 기자를 크게 둘로 구분한다면 이렇게 될 것 같다. '연합' 없이는 기사를 쓸 수 없는 기자연합 없이도 기사를 쓸 수 있는 기자. 여기서 연합이란 통신사인 연합뉴스를 말한다. 생소할 수 있는 이같은 분류는 많은 얘기를 함축하고 있다.


요즘엔 인터넷으로 연합뉴스 기사를 직접 보는 독자가 많지만 사실 연합뉴스의 고객은 일반 독자가 아닌 개별 언론사다. 연합뉴스 같은 통신사(연합뉴스의 예전 이름은 연합통신이었다)는 개별 언론사와 계약을 맺고 자신들의 기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뉴스 도매상으로도 불린다.


인터넷이 일반화되기 전 연합뉴스의 고객사인 언론사들은 전용 단말기를 통해 연합뉴스 기사를 확인했다. 돈을 내야만 기사를 볼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인터넷으로 뉴스를 소비하는 것이 일반화되면서 연합뉴스 또한 자사 기사를 인터넷으로 볼 수 있도록 했다. 자연히 기존 고객인 언론사들 입장에선 '그럼 내가 돈 내고 너희 기사를 받아볼 이유가 뭐가 있냐'는 불만이 나왔고, 이들을 달래기 위해 연합뉴스는 기존 고객에게 기사를 먼저 제공하는 유인책을 내놨다. 인터넷에 기사가 올라오기 1시간쯤 전에 고객사들이 자사 기사를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일부 기사는 인터넷에 노출하지 않고 언론사에만 제공하도록 했다.


따지고 보면 고작 1시간 일찍 보자고 언론사들은 수 억 원에 달하는 돈을 연합뉴스에 지불한 것이다. 일반인들로선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식의 장사가 가능했던 것은 일선 기자들이 이를 원했기 때문이다. 기자들 입장에선 1시간 일찍 연합뉴스를 받아볼 유인이 충분했던 것이다.


※ 몇 년 전부터 언론사들이 경영난 심화로 여기저기 비용 아낄 궁리를 하면서 자연히 한해 수억 원에 달하던 연합뉴스 이용료가 도마에 올랐다. 조선일보를 필두로 하나둘씩 기사 이용 계약을 해지했고, 지금은 대다수 언론사가 사진 전재 계약 정도만 맺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기자들은 왜 기사를 작성할 때 연합뉴스에 목을 매는 것일까.


신문이나 방송, 온라인에 보도되는 기사는 언론사가 독자적으로 취재해 보도하는 일부 단독이나 기획 기사를 제외하면 주요 출입처(청와대부터 정부부처, 기업, 시민단체 등)가 제공하는 보도자료나 정보를 토대로 작성된다. 모두가 동일한 기사 소스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서로 다른 신문이나 방송 간에 보도되는 내용이 비슷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기사로 작성하는 내용이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상황에서, 연합뉴스는 해당 사안에 대한 기사를 가장 빨리 작성해 공개한다. 신문이나 방송은 대략 오후 4~5시를 전후해 기사를 마감하는 데 비해 온라인에 기사를 올리는 연합뉴스는 취재가 끝난 즉시 기사작성에 들어가 최대한 빨리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뉴스 도매상으로서 고객인 언론사들이 신속하게 자사 기사를 보고 참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매일매일 기사작성이란 숙제를 안고 사는 기자들에겐 이처럼 연합뉴스가 일종의 답안(모범답안인지는 모르겠다) 제공하는 셈이다. 미리 문제풀이를 끝낸 친구가 자기 답안을 공개한 마당에 이를 참고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하겠다.


문제는 어쩌다 참고해야 할 친구 답안을 수시로 참고하면서 점점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의존이 심해지다 보면 단순히 참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베끼다시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점에서 연합뉴스 기사는 기자들에게 과거 대다수 국민학생들 집에 한 권씩 비치돼 있던 표준전과(표준국어대사전에선 '전과(全科)'를 '초등학교의 전 과목에 걸친 학습 참고서의 이름'으로 정의하고 있다)라 할 수 있다.

당시 '숙제하다'는 '전과를 베껴 쓰다'와 동의어였고, 그랬기에 다음날 학교에 가보면 거의 모든 반 친구들의 답안이 동일했다. (물론 갖고 있는 전과의 출판사가 어디냐에 따라 답이 조금씩 다르긴 했다)


전과에 의존하는 아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생각할 힘을 잃게 된다. 우리나라 교육의 창의성 부족을 지적할 때 획일화된 교과과정, 주입식 교육 등을 단골 소재로 삼곤 한다. 여기에 덧붙여 적어도 표준전과를 애용하던 세대에겐 전과 또한 아이들의 창의성을 앗아가는 데 일조했으리라 본다.


이렇듯 연합뉴스가 전과의 역할을 하다 보니 가뜩이나 학창 시절 전과 용에 익숙하던 기자들은 연합뉴스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됐다. 일선 기자들의 연합뉴스 의존도는 아기들이 가짜 젖꼭지나 안전 담요(security blanket)를 찾는 것에 빗댈 만하다. 없으면 불안해서 못 견디는 것이다. 자기가 쓰려는 기사의 마감 독촉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해당 내용을 다룬 연합뉴스 기사가 아직 올라오지 않으면 식은땀을 흘릴 기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10년도 더 전, 수습(修習)기자 시절 일이다. 내가 숙식(기자들끼린 '하리꼬미'라고 한다)하던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피의자가 창문에서 뛰어내려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경찰서 마당 벤치에 앉아있던 나는 '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복 경찰들이 후다닥 뛰어오는 걸 보고 특종(特種)을 직감했다. 혹시라도 타사 수습이 알까 노심초사하며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낑낑대던 찰나 (그때까지 누군가 건물에서 뛰어내린 것 같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1진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거기서 조사받던 사람이 뛰어내려서 죽었다며?"

"..."


숨겨봐야 들통 날 거 이실직고하기로 한 경찰이 신속하게 해당 경찰서를 출입하는 1진 기자들에게 사건의 개요를 밝힌 것이다. 수습기자로서 사사(社史)에 길이 남을 특종을 하게 됐다고 혼자 김칫국을 마시고 있던 나로선 이 정도 사건으로는 별 기사가 안된다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잠시 뒤 경찰 측 브리핑을 듣기 위해 1진 기자들이 내가 있던 경찰서로 우르르 몰려왔다. 브리핑이 끝나자 1진 기자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내가 기거하던 2진 기자실에 들어오더니 내가 쓰던 책상에 노트북을 펴놓고 담배를 꼬나문 채로 (요즘은 제아무리 경찰서 기자실이라 해도 자리에선 담배를 못 피운다)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1진들에게 아직 정식(正式) 기자 타이틀을 달지 못한 수습(獸習: 수습기자의 비천한 처지를 표현하기 위해 '닦을 수'(修) 대신 '짐승 수'(獸)를 사용하곤 한다) 기자는 투명인간이나 마찬가지다. 어차피 나 같은 거 신경도 안 쓰는 거, 잘난 너희 1진들은 어떻게 기사를 쓰나 궁금해서 옆에서 슬쩍 지켜봤다. 1진이란 자들의 초식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통신사 기사 창에서 연합뉴스 기사를 긁어온다, 이를 자기 회사 기사 프로그램 창에 갖다 붙인다, 이를 토대로 쳐낼 건 쳐내고 붙일 건 붙여가며 (중간중간 머리를 세게 긁적이고 욕설을 내뱉기한다) 재조합해 기사를 완성한다. 이들은 '훌륭한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고 했던 피카소의 명언을 매일 실천하고 있었던 셈이다.


당시 1진들의 기사 작법(作法)을 옆에서 지켜보며 선배 기자들에 대한 환상과 경외심을 한층 누그러뜨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들도 나와 같은 일개 인간이었음을 알고 위안하게 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당시 난 짐승과 동급인 수습(獸習)이었기에 아직 인간이 되기 전이었지만)


그로부터 얼마 후, 나 역시 1진이 되고 소위 1진 기자실로 진출하니 일선 기자들의 보다 노골적인 연합 사랑을 목도할 수 있었다. 농반진반으로 친한 연합뉴스 기자에게 '기사 언제 올릴 거야? 기사를 보낼 수가 없잖아'라고 채근하는 풍경을 기자들이 모여있는 곳에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사실 '와꾸'(구조)를 갖다 쓰는 것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다. 어느덧 개봉한 지 20년도 더 된, 기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이 러브 트러블(I love trouble)'이란 영화(사회부 초년 기자로 등장하는 앳된 모습의 '줄리아 로버츠'를 볼 수 있다)를 보면 베테랑 사회부 기자인 주인공 '닉 놀테'가 자기가 예전에 썼던 기사를 불러내 사람 이름 같은 팩트 몇 개만 살짝 바꾼 뒤 그대로 출고했다가 편집장에게 발각되는 장면이 나온다. 자기 표절인 셈이다.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교통사고, 살인, 화재 같은 사건사고 기사는 이처럼 어느 정도 정해진 형식이 있다. 그 틀이 숙달되지 않았거나 일일이 기사 쓰기가 귀찮은 기자들은 연합뉴스 기사를 '원형'으로 삼아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적지 않은 기자가 팩트마저 베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기사 작성에 앞서 사실 확인이 전제돼야 할 기자로서 심각한 도덕 불감증(不感症)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기사의 질이 떨어지고 가짜 뉴스가 난무하게 된 데에는 이처럼 기본적인 팩트조차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갖다 쓰는 일부 기자들의 관행이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최근 만난 한 대기업 홍보담당자의 푸념이다. 기사에 인용한 발언이 사실과 달라 '사실은 이런 겁니다'라고 설명하고 기사 내용을 수정해 줄 수 있느냐고 물으니 기사를 쓴 쪽에서 말하길, '연합이 (기사를) 안 바꿨는데 꼭 바꿔야 돼요?'라고 하더란다. 스스로 연합뉴스 기사를 그대로 베껴 썼다는 걸 자인한 셈이다.


상식적인 기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직접 취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팩트를 알고 있는 당사자가 팩트를 정정해오면 그때라도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기사에 반영하는 것이 순리(順理)다.  (물론 말을 한 사람이 앞서 한 발언 때문에 곤란해진 나머지 거짓말을 하는 경우라면 얘기가 다르다)

하물며 직접 인용이 된 당사자의 말을 전해 들은 사람(연합뉴스)이 그 말을 수정하지 않았으니 나도 수정하지 않겠다고 하는 건 일부 기자의 도덕 불감증게으름(이미 나간 기사를 고치려면 귀찮으니까)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보여준다.




기사 쓰기는 기자의 기본 자질(資質)이다. 기자들 사이에선 취재를 못하는 기자는 살아남아도 기사를 못 쓰는 기자는 살아남기 힘들다고 말한다. 특종 기자니 뭐니 해도 이를 글로 풀어낼 능력이 안 되면 기자로선 결격(缺格)이란 얘기다.


인터넷 매체가 범람하고 속보(速報)가 중시되면서 갈수록 글이 안 되는 기자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기자들은 처음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다양한 팩트나 견해를 참고하겠다는 핑계로 연합뉴스나 타사(他社) 기사를 참고하고 베껴 쓰다, 나중엔 베껴 쓰는 게 자신의 일인 줄로 착각하는 지경에 이른다. 기자(記者)가 사실상 속기사(速記士)로 자리 바꿈하는 것이다.


누구나 글을 쓰고, 누구나 자신이 쓴 글을 일반 대중(大衆)에게 선보일 수 있는 시대다. 과거에는 언론사란 거대 플랫폼에 소속된 기자들만이 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글을 선보이는 특권(特權)을 누렸지만, 이제는 블로그나 브런치 같은 플랫폼을 통해 누구든 대중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줄 수 있는 세상이 다.


이처럼 과거 언론사가 누리던 기득권(旣得權)이 사라질수록 기자와 기사의 경쟁력은 글쓰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특히 비슷비슷한 발생 기사를 쓰는 기자보다 자신만의 시각을 담아낸 칼럼을 쓰는 기자의 경쟁력이 높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발생 기사부터 베끼는 데 익숙해진 기자가 아무리 연차가 쌓인 들 자신만의 시각을 벼려낸 칼럼을 쓰는 것이 가능할까.  연합뉴스 없이 제대로 된 기사 한 줄 못 쓰는 기자들은 지금이라도 자신의 관행을 고치기 위한 노력을 하든지, 아니면 심각하게 자신의 앞날을 고민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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