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브린이란 영국 출신 전직 언론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지난 달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때문이다. 이 칼럼('과연 광화문 광장이 적절한 공간일까' 조선일보 4월6일자)은 세월호 추모공간을 광화문에 세우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란 질문을 제기하며 "이 나라에는 자신이야말로 사악한 '타인'의 희생자라고 내세우고 싶어하는 경향, 따라서 자신은 도덕적이라고 느끼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칼럼은 이틀 뒤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이 인용한 것을 계기로 '논란'이 됐다. KBS '저널리즘 토크쇼J'란 프로그램에서 한 출연자가 브린의 칼럼이 조선일보가 하고 싶은 말을 사실상 명의만 빌려주고 해준 일명 '복화술 저널리즘'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KBS 기자는 브린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칼럼을 쓰게 된 이유가 뭔지, 실제로 조선일보의 사주(?)가 있지는 않았는지 취재했다고 한다.
KBS 기자가 이 칼럼이 나오기 얼마 전에 전면 개정돼 재발간된 브린의 '한국, 한국인'을 읽었다면 그런 식의 취재는 이뤄지지는 않았으리라고 본다. 책을 읽어봤다면 브린이 칼럼에서 견지한 주장이 이미 그의 책에 일관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문장이 그렇다.
피해의식은 정의감을 부여하기 때문에 달콤한 유혹이다. 당신의 나쁜 면조차도
다른 깡패 국가의 책임이다.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35년동안 계속된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났을 때의 정서였으며, 이제는 이와 같은 정서가
한국의 역사 전체를 거슬러 확장되었다.
<한국, 한국인> 124P
때로는 내부자들이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고도 말 못하는 부분을 외부자(*귀화한 브린의 경우 순도 100%의 외부자는 아닐지라도)가 날카롭게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영국에서 태어나 1980년대부터 한국에 살아오면서 한국 사회를 직접 관찰해 온 브린은 그런 견지에서 한국에 대해 제 3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적격자다. 실제로 책 곳곳에서 그는 외부(보다 정확히는 서구 선진국)의 건전한 상식과 평가라는 메스를 들고 한국 사회의 환부를 드러낸다. 희생자, 피해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우리가 종종 얼마나 객관성을 잃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로 보여준다.
한국 정부가 사면한 83명의 전범은 1년반에서 종신형까지 선고받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직무를 수행한 군인이나 수용소 경비원으로
재판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직무수행의 범위를 벗어나는
결정과 행동을 한 과도한 열정 때문에 재판을 받았다.
야수나 다름없는 '무서운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한국, 한국인> 213P
한국인들이 분단을 막을 수도 있었을까? 한국에서는 이런 의문이 제기되지 않으며, 한국인들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수용되지 않는다. 이 역시 부분적으로는 한국인들이 스스로를 피해자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한국, 한국인> 221P
이처럼 '한국, 한국인'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를 꼽자면 한국인의 '과도한 피해의식'과 '민심이란 야수에 대한 경계'로 요약된다.
먼저 한국인의 피해의식과 관련해 저자는 대한민국이 여전히 개도국이고 일본과의 경쟁이 불가능했을 때는 피해자 측면을 부각하는 것이 국제사회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소니를 비롯한 일본 전자업체들이 삼성과 LG와의 경쟁에서 몰락하고 세계에서 7번째로 30-50클럽(인구 5000만명, 소득 3만달러)에 가입한 현 시점에서 여전히 일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처럼 비쳐져서는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이런 피해의식이 사회 전반에 만연하면서 종종 자신의 잘못이나 책임조차도 다른 데 전가하려고 하는 왜곡된 정의로 나타나곤 한다는 것이 저자의 통찰이다.
다음으로 저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격화한 '민심'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날 것을 자신의 바람을 담아 주장한다. 한국인의 피해의식에 대한 통찰도 뛰어나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딱 한 가지가 있었다면 이 '민심'에 대한 부분이리라 생각한다.
저자는 "국민정서는 여론과 국민보다 상위에 있다. 끝나기를 기다릴 수는 있어도 맞서 싸울 수는 없다"며 "국민정서는 민주 한국의 신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국민정서는 살아있는 권력을 무너뜨렸고 촛불 민심이란 이름으로 현 정권에서 여전히 꺼지지 않는 성화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국민 정서는 결코 절대선이 아니기에 브린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한국에서는 어떤 쟁점에 대한 대중의 정서가 특정한 임계질량에 이르면 앞으로 뛰쳐나와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야수로 변모한다. 한국인들은 이 야수를 '민심'이라고 부른다.
<한국, 한국인> 415P
보다 구체적으로 신약성서의 예수 이야기에 빗대, 저자는 민심에 매달리는 정치를 '폭민(暴民) 정치'와 다름 없다고 지적한다.
신약성서의 예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런 방식의
접근이 폭민정치와 다를 바 없으며, 법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피고인을
폭민정치에서 보호하는 전기담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폭민을 '국민'이라고 보며
국민의 뜻에 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요체라고 생각한다.
<한국, 한국인> 328P
이런 점에서 승리 사태의 불똥이 튀자마자 모든 방송에서 전격적으로 하차한 탤런트 차태현은 '국민정서법'의 작동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대처한 경우라 하겠다. 민심은 '끝나기를 기다릴 수는 있어도 맞서 싸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서 분노한 민심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이 이렇게 법과 제도가 아닌 '민심'의 눈치를 보고 사는 것이 정상일까. 또 우리는 이 같은 비정상을 언제까지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 한다. 브린은 총대를 멜 사람은 '강한 지도자'라고 말한다. 결국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도 그냥 대통령이 아닌, 국민들의 강한 지지를 받는 집권 초기의 '강한' 대통령이어야 한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국민정서는 폭민정치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에
가둬 놓아야 할 짐승이다. 이제 한국에는 국민 대다수가 원하거나
옳다고 믿는 것이라도 때로는 거스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말이 거리시위나 온라인 항의에 의해서
의사결정이 이뤄진다는 의미가 아니며, 안정된 민주주의는 대의제도와
법치에 기반을 둔다는 것을 이해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한국, 한국인> 482P
현재의 대통령은 율사 출신임에도 민심을 법치와 대의제도로 대체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저자도 책에서 취임 초기의 문 대통령이 적임자이긴 하지만 그렇게 할 가능성은 낮다고 전망했다. 그는 "국민정서에 힘입어 일거에 청와대의 주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을 대표하여 독재에 저항하면서 최루가스 속에서 성장한 세대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여 대한민국이 진정한 법치주의 국가로 거듭나는 것을 이번 세대에 보는 일은 요원할 것으로 내다봤다.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현 정권은 야수를 가두는 대신 거기에 올라타는 쪽을 택한 것 같다. 아마 자신들이 고삐를 단단히 쥐고 있으니 문제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정해진 주인이 없는 야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다음 번엔 어느 쪽을 향해 이빨을 드러낼 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야수가 다시금 깨어나 예의 그 공격성을 드러냄으로써 수많은 이들이 제물로 바쳐진 다음에야 우리 사회는 야수를 우리에 가두는 방안에 대해 비로소 진지하게 고민할 지 모른다. 또 그 때에 가서야 언론은 브린이 <한국, 한국인>에서 제기한 통찰을 늦게나마 조명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