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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Jun 24. 2019

자사 보도로 돈 잃게 된 언론사 사주의 선택은?

개인 돈 1억 달러 투자한 스타트업, 자사 기자가 비리 파헤친다면?

책을 고를 때 저자가 기자인 경우 내 나름의 선택법이 있다. 외국(특히 미국) 기자가 쓴 책이라면 '믿고 보고', 우리나라 기자가 쓴 책이면 '믿고 거른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기자들의 취재력이나 필력을 폄하하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 기자들이 어떤 환경에서 책을 쓰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회사에 소속된 기자가 자신의 책을 쓰는 건 '가욋일'이다. 업무 외 시간에 집필을 한다 하더라도 기자를 고용한 회사 입장에선 피고용인이 본업에 집중하지 않고 한눈파는 게 그리 마뜩지 않다. 얼마 전 책을 출간한 한 현직 기자는 "올해 안에 책을 한 권 더 출간하게 됐는데 회사 눈치 때문에 이번엔 사측에 알리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 기자들이 쓴 책은 기존에 쓴 칼럼을 모아 출간하거나 기존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책을 위해 따로 추가 취재를 하거나 집필을 위해 휴직을 하는 경우는 몹시 드문 실정이다. 자연히 밀도 있고 스토리 텔링에도 신경을 쓴 수작(秀作)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다.


그에 반해 일부 미국 기자들이 쓴 책들 중엔 '어떻게 저런 걸 취재했지' 싶은 생각이 들며 같은 기자 출신으로서 경외감마저 들 때가 종종 있다. 책을 쓰기 위해 6개월, 1년씩 휴직하고 집필에 전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자연히 스토리텔링 방식을 고민할 여유도 생길 것이다. 그렇다 보니 어떨 땐 특정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묘사가 너무 구체적이어서 논픽션임에도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WSJ 기자가 쓴 '배드 블러드'


월스트리트저널(WSJ)의 탐사보도 전문기자 '존 케리루'가 쓴 '배드 블러드(Bad Blood)'를 읽으며 다시금 혀를 내둘렀다. 이 책은 피 한 방울로 각종 질병 검사를 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며, 한때 제2의 '페이스북'으로 추앙받았던 미국의 의료기기 스타트업 기업 '테라노스'(치료(Therapy)와 진단(Diagnosis)의 합성어)가 있지도 않은 기술로 어떻게 고객과 투자자들을 기만했는지, 그 흥망성쇠를 추적한 논픽션이다. 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가 밝혔듯이 저자는 취재 대상인 '테라노스' 직원 60명을 포함해 150명이 넘는 사람과 진행한 인터뷰를 기반으로 책을 썼다.


인터뷰한 숫자도 숫자지만 이들 인터뷰는 통상 기자들이 데일리 기사를 쓸 때처럼 특정 멘트를 따기 위한 겉핥기 식 인터뷰가 아니다. 때론 어떤 식으로 인터뷰를 했기에 저런 워딩이나 팩트들을 건져냈을까 싶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면 마치 한 사람의 일상을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크리스천(*테라노스 CEO 엘리자베스 홈즈의 친동생)이 테라노스에 처음 입사했을 때 그에게 맡겨진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는 스포츠 관련 기사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ESPN 홈페이지에서 기사를 복사하고 이메일 창에 붙여 넣어 몰래 읽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았을 때에는 그가 업무 관련 이메일을 읽느라 몰두한 것처럼 보였다."  -'배드 블러드' 中 150P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눈길이 갔던 부분은 언론사 사주(社主)의 이해관계가 걸린 취재가 이뤄졌을 때 사주가 보인 반응이었다. 잘 알려졌듯이, 현재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최대주주는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뉴스코퍼레이션이다. 공교롭게도 머독은 케리루가 테라노스의 비리에 대해 취재할 무렵, 개인적으로 이 회사에 1억 2500만 달러(약 1450억 원)를 투자했다. 테라노스의 CEO인 엘리자베스 홈즈는 WSJ의 기사를 막기 위해 집요하게 루퍼트 머독을 설득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머독의 방문 도중, 홈즈는 내가 테라노스의 뒷조사를 하고 있는데 그 정보가 모두 허위 정보이며, 만약 그래도 발표되면 테라노스에 큰 피해를 입힐 것이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머독은 '월스트리트저널' 기자들이 문제를 공정하게 처리할 거고 그들을 신뢰한다고 말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9월 말, 내가 한창 기사 발표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 홈즈는 맨해튼 미드타운의 뉴스 코퍼레이션 빌딩 8층 사무실에서 머독과 네 번째로 만났다...  홈즈는 머독과 만나 다시 한번 긴급하게 내가 작성하고 있는 기사 이야기를 꺼내며 머독이 중재해 주기를 바랐지만, 머독은 테라노스에 막대한 투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입하기를 거절했다."

- '배드 블러드' 389P



결국 피 한 방울로 수 백가지 질병을 진단한다는 테라노스의 신화가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을 밝힌 기사는 나갔고, 한때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유니콘'(예상 기업가치가 10억 달러 이상인 스타트업을 지칭)이었던 테라노스의 회사 가치는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저자는 "언론계 거물인 머독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테라노스의 주식을 모두 1달러에 처분하여 손실로 신고하고, 다른 투자로 얻은 수익에 관해 세금을 대폭 감면받을 수 있었다. 120억 달러의 자산을 가진 머독은 잘못된 투자의 대가로 1억 달러를 잃을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421P)라고 적었다.



만약 우리나라 언론사 사주가 비슷한 경우에 처했다면 어땠을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언론사주라면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렸을 때 문제가 되는 자사(自社) 기자의 취재를 막을 거라고 생각할 것 같다. 여타 재벌과 마찬가지로 언론사 사주들도 기업을 개인 소유로 생각하고 있고, 직원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사 하나쯤 막는 건 일도 아닐 것이라고 말이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우리나라 언론사 사주들도 (신생 인터넷 매체가 아닌, 어느 정도 역사를 지닌 전통적인 매체의 사주에 국한한다면) 개인적 손실이 지나치게 크지 않다면 이를 감수하고 취재를 진행하도록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는 언론사 사주의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여타 기업과는 다른 언론의 속성 때문이다.


머독 같은 거대 미디어 재벌과 달리, 국내 언론사들의 경우 소위 '조중동' 같은 메이저 언론사라고 해도 한해 매출이 (신문에 국한하면) 2000억~3000억 원대 수준이다. 매출 규모만 놓고 보자면 어지간한 중견 기업에도 끼지 못하는 수준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웬만한 대기업을 능가한다. 언론의 영향력 때문이다.


이런 언론의 영향력이 유지되려면 외부의 영향에서 자유롭다는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적어도 겉으론 그렇게 보여야 한다). 정권의 위협에, 단 돈 몇 푼에 기사를 맘대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누구도 그 언론사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사장과의 친분을 무기로 전화 한 통에 쉽게 기사를 바꿀 수 있다면 당장 언론사 내부에서부터 사주의 권위는 무너지게 된다.

자연히 그 언론사에서 점차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칠 만한 기사들은 사라지게 되고, 그에 비례해 그 언론사의 명줄 또한 줄어들게 된다.  


제대로 된 언론사의 사주들은 이러한 언론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머독처럼 자사 기자의 취재를 막아달라는 주변의 청탁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은 "내가 사장이긴 하지만 나도 (우리 기자들이 취재하는 건에 대해선)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사실 언론사 사주들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자신 앞에서 아쉬운 소리를 하며 읍소할 때 가장 큰 희열을 느낀다. 이것이야말로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언론 권력의 진정한 매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광고주의 입김에 의해 민감한 기사를 수정 혹은 삭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런 일은 회사를 먹여 살리는 영업 관련 부서와 광고주인 기업을 담당하는 경제, 산업부 선에서 담당하고 있다. 


전통적인 언론은 기사를 생산하는 편집국(보도국)과 영업 관련 부서가 분리돼 있고, 양자 간에 기사를 매개로 한 협력이 이뤄지지 않도록 '방화벽'이 쳐져 있다. 언론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다.

하지만 최근 이 같은 방화벽이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매출 하락으로 인한 영업 압박으로 인해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영업 관련 부서가 편집국의 '힘'에 의지해 영업에 나서는 것이다. 양자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언론의 신뢰도는 추락하게 된다. 양자의 거리가 극단으로 좁혀지면 일선 ㆍ 기자가 자기가 쓰는 기사를 무기로 직접 영업을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미 소규모 언론사의 경우 보도와 영업이 분리되지 않은 곳이 적지 않고,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언론사조차 기자가 영업에 개입하는 곳이 적지 않다. 기자의 영업이 일반화되고 나아가 영업을 위해 일부러 광고주에 악의적인 기사를 생산하는 지경에 이르면 언론은 사회적 공기(公器)

가 아닌 흉기(凶器)가 된다. 만약 기자뿐 아니라 사주까지 영업에 나서는 곳이 있다면 사이비 언론이라고 보면 된다.


결국 언론사 사주가 외부의 청탁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그 언론의 수준을 드러낸다. 언론사 사주가 민감한 자사 기사에 대한 방패막이 역할을 포기하면 외부에서도 그 언론사를 만만하게 보게 되고, 결국 그 언론사는 더 이상 정상적인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적어도 자신을 여타 중소기업 사장이 아닌, 언론사 대표로 인식하는 사주라면 좋든 싫든 방패막이 역할을 자신의 숙명으로 여길 것이다.


문제는 나날이 매출이 줄어드는 것을 비롯해 자꾸만 외풍이 거세지는 최근의 언론 환경이 언론사 사주들의 맷집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소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언론사 사주가 '가오'를 지켜나갈 때 언론의 신뢰도 또한 유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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