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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요리

사람은 자기의 세계를 넓혀준 사람을 잊지 못한다

by 행복의 진수 Mar 05. 2025

 대성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우리 반은 대성리로 MT를 떠났다. 담임은 카투사 출신이자 전교조 소속의 수학 선생님이었다. “참교육은 소수의 선택받은 학생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학생에게 인간다운 삶을 위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며, 개인의 삶뿐 아니라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이는 공동체적인 삶의 가치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전교조의 이념을 몸소 실천하시던 분이었다. 선생님은 혈기 왕성한 고2 남학생들에게 교과서와 학교 밖 세상을 직접 마주하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대성리에서 생애 처음으로 요리를 해봤다. 한 번도 음식을 해본 적 없었던 내가 선택했던 메뉴는 ‘김치볶음밥’과 ‘카레’였다. ‘김치볶음밥? 그거 뭐 김치 송송 썰어서 햄 넣고 대~충 볶으면 되는 거 아닌가? 카레? 더 쉽지~ 감자랑 당근, 양파 썰어서 카레 가루 넣고 끓이면 끝! 아니야?’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핵주먹’ 세계최강 복싱선수 마이크 타이슨의 말이 맞았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요리라는 게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다. 재료 준비부터 뒷정리까지 손이 많이 가고 꽤 품이 드는 일이었다. 게다가 3분 카레를 데워서 나 혼자 간단히 먹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우리 조원 대여섯 명의 식사를 책임지고 완수해야 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된 시절도 아니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도움을 요청했다. “엄마, 김치볶음밥이랑 카레 하려는데 뭐부터 해야 해?” 엄마의 대답에 허를 찔렸다. “밥부터 해야지!” “아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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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둘러 쌀을 씻고 전기밥솥에 밥을 얹혔다. 김치를 볶기 시작하다 냄새가 퍼졌다. 속도 모르는 반 친구들은 "오! 요리 좀 하는데?"하고 놀랐지만, 나는 그저 김치를 태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불 조절? 그게 뭐죠? 남자는 센불이지! 불은 그냥 끄던가 만땅으로 조지는 거 아닌가?’ 참으로 ‘0 아니면 1’이라는 디지털적인 이분법의 사고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요리의 본질은 꼼꼼한 아날로그에 더 가까웠다. 내 멋대로 저지른 요리의 결과는 처참했다. 불 조절에 대한 개념도 없는데, 제대로 된 요리가 나올 리는 만무했다. 기름 없이 볶은 김치는 밍숭맹숭했다. 햄과 밥이 따로국밥처럼 서먹서먹하게 각자 놀았다.


 ‘그냥 맨밥에 구운 햄이랑 김치를 얹어 먹는 게 더 맛있겠는데?’라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한 숟가락 드신 담임쌤이 말했다. “오! 진수. 요리 잘하는데?” 그 한마디에 처음 해보는 거지만, 요리가 좋아졌다.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된 일이라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카레도 물 조절에 실패했던 거 같다. 내가 요리에 특출난 재능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믿고 맡겨주신 담임쌤 덕분에 뿜어오르는 자신감과 함께 뿌듯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돌도 씹어먹을 나이의 고2 청년들은 내 첫 요리를 군말 없이 먹어 치웠다. ‘맛없으면 어쩔 건데? 꼬우면 니들이 하든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섬세하지 못한 미각의 남학생들은 준비한 요리를 남김없이 튼실한 위장으로 욱여넣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날, 대성리역에서 본 구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날 찍은 사진들이 계기가 돼서 사진학과에 진학했던 건지도 모른다. 첫 요리의 기쁨과 함께 진로에도 영향을 준 고2 시절 대성리 MT. 그 소중한 추억 덕분에 나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다양한 경험과 넓은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NCT의 지성이 말했다. “사람은 자기의 세계를 넓혀준 사람을 잊지 못한다.”라고. 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칭찬의 힘. 첫 도전에 만족할 만한 성취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작은 성공을 거두든 큰 실패에 맞닥뜨리든, 믿고 지켜봐 주는 사람의 존재다. 누군가에게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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