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어르신들과의 추억

by 마들렌

몇 년 동안 어르신들과 생활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노년의 지혜느림의 미학이 아닌가 싶다.

조금은 굽은 듯한 몸 곳곳에는 세월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걸음도 느릿느릿하시고, 말씀도 천천히 하셨지만 말씀 하나하나에는 연륜과 지혜가 담겨져 있었다.

나보다는 수십 년 먼저 태어나셔서 세상 구경을 하셨고, 인생의 온갖 쓴맛 단맛은 물론, 산전, 수전 소위 말하는 공중전까지 겪으셨으니 그야말로 인생살이의 달인이신 것이다.


첫 출근을 하던 날, 나를 따뜻하게 맞이 해준 사람은 같은 사무실을 쓰게 될 직원 수녀들이 아니라, 나를 딸같이 생각하며 맞이해 주신 어르신들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된 때인 나는 어르신들의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씨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그래서 있는 동안이라도 잘해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양로원은, 일상생활이 가능하신 65세 이상의 어르신들이 입소할 수 있는 곳이다. 실비 시설도 있고, 유료시설도 있고, 국민기초생활수급자만 입소하실 수 있는 기관도 있다.

내가 근무했던 곳은 실비 시설로 중산층 가정의 어르신도, 수급자 어르신도 오실 수 있는 곳이었다. 공기 좋은 산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에는, 번잡함을 피해 여생을 조용히 보내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선호하셨고, 경치 구경도 하고, 이웃과 도란도란 나누며 지내고 싶어 하는 분들이 주로 계셨다.


사계절의 변화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고, 미사 참례를 하러 차를 타고 나가지 않아도 되었으며, 근처에는 온천도 있었다. 규칙적인 생활과 여가시간을 재미나게 보낼 수 있게 도와드릴 직원도 있었고, 어르신들의 건강관리를 위해 간호사도 상주하고 있었다.


출퇴근 길이 멀었던 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좀 더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기도 하였지만, 도심을 벗어나자 시야에 들어오는 주변 경치는 사계절의 변화가 너무나 확연하고 아름다웠다. "우와~ 기똥차다!" 하며 가끔은 차를 세우고 한참 동안 바라보게 되는 시외곽지에 있는 곳이었다. 자연이 주는 경이롭고 아름다운 장관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고, 한 장의 그림엽서를 장식하기에 손색이 없는 아늑함과 넉넉함을 안겨주는 그런 곳이기도 하였다.




"어르신, 산에 가세요? 저도 같이 가도 돼요?"

"그럼요, 같이 갑시다. 오늘이 경칩(음력 3. 8)이라 뱀이 나올 수도 있으니, 조심하이소~" 라고 말씀하셨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산책을 가시는 어르신들의 뒤를 쫄랑쫄랑거리며 따라 걸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3~40분을 걷다 보면, 요즘 어르신들이 편안하신지, 어떤 어려움은 없으신지, 또는 양로원 안에 새로운 이슈(?)는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헉! 어르신, 저기, 저기!"

내가 걷다가 뭘 보고는 다급하게 목소리를 내자, "가~만히 있으소. 지나가구로." 천지 급할 것 없는 여유로운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저것도 얼마나 놀랬겠어요? 사람한테 들키으니까(사투리)..." 하며 나지막이 속삭이셨다.


그렇다. 어르신들의 말씀처럼 여기는 산짐승들의 땅이고, 그들의 영역인데 사람인 우리가 들어온 것이다.

산을 인접하여 살고, 자주 산으로 산책을 다니면서 어르신들로부터 배우게 된 진리이다. 겨우내 겨울잠을 자던 짐승들이 마실을 나왔는지, 암갈색의 굵은 뱀이 스르르~ 나뭇잎을 스치며 조용히 지나갔다.


'오늘이 경칩이라고?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경칩이라더니, 뱀~ 너도 깨어났구나!'


24절기(태양의 황도상 위치에 따라 계절적 구분을 하려고 만든 것)는 정말 과학적인 시간 계산법인 것 같다. 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오늘은 깨어나는 것을 보니 말이다. 어르신들도 달력은 보시지만, 주로 절기를 기준으로 집안일을 계획하고 진행해 나가시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여러 해를 살다 보면, 뱀을 보는 것은 그리 호들갑 떨 일이 아니건만, 나는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마 혼자 보았더라면, 기겁을 하고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그 후, 뱀을 피해서 마을 길로 산책을 나왔는데, 거기서도 마주치게 되는 뱀을 보고는,


나도 너를 보고 놀랬는데, 너도 나를 보고 놀랬겠지? 미안 미안~ 내가 빨리 지나갈게~."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얼른 피해 가기도 하였다. 그전에는 알지 못했던 숲의 주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배우게 된 것이다.

(사실 그전에는 몰랐지만,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난 후 보니, 뱀들도 놀란듯한 모습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변화무쌍한 날씨를 기상예보관보다 더 정확하게 알아맞히시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널어놓은 빨래를 걷기도 하고, 우산을 준비하는 여유도 생겼다.


겨우내 척박했던 대지와 앙상한 나뭇가지에 봄기운이 찾아오면, 가지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터져 나왔고, 땅에서는 새싹이 그 쪼그마한 몸으로 언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자연의 위대함과 생명의 신비를 느끼게 되었다. 어르신들은 때 맞추어 쑥이며, 다래며, 봄나물을 캐러 바구니를 들고나가셨고, 그날에 캐온 쑥은 '쑥버무리'로 식탁에 올라오거나 장에 가서 맛있는 떡으로 탈바꿈하여 돌아오곤 하였다. 그 덕에 나는 온갖 떡들을 고루고루 맛볼 수 있는 즐겁고 행복한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온갖 새들이 지저귀고,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할 때는 모두가 가슴 설레며 나들이를 준비하였고, 신나게 봄바람을 맞으러 가기도 하였다. 어르신들이 일찍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셔서 이왕이면, 저녁까지 해결하고 해가 떨어지면 귀가하는 일정을 짜야만 했다. ㅠㅠㅠ...


서류만 만지작 거리던 나는, 어르신들과 지내면서, 꽃 이름, 나물 이름들을 귀동냥하게 되었고, 잣이 왜 그렇게 비싼지 직접 보고 만져보고 까 보면서 터득하게 되었다.


가을이 무르익어 갈 무렵 밤을 주우러 나갔다가, 떨어지는 밤송이에 테러를 당해 별이 번쩍번쩍 보인 적도 있었지만, 내게는 색다른 경험이 되기도 하였다.


눈이 많이 내리기 시작하면, 나는 조바심을 내면서 퇴근길을 서둘러야 했다.

장독대 위 눈이 17cm가 쌓인 날은, 정말 오지 말라고 했으면 좋으련만...

미끄러운 도로 위를 조심하면서 달렸지만, 차가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비상등이 켜지고 멈추기는 하였는데... 아찔한 상황을 겪고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어질 때도 있었다.


그런 나를 걱정하고, 애를 태우며 기다리다가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것은... 어르신들의 몫이었다. 참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어르신들을 모시고 지내는 동안 많이 배웠고, 많이도 사랑받았다.

건강하게 잘 지내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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