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와 나눈 어머니 이야기
어제 영화 한 편을 보고 왔다.
한참 동안 고대하던 바로 그 영화, '미나리'였다. 물론 혼자였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혼자서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조금도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북적거리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조용한 날을 선택하였다. 평일 오후 극장을 찾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코로나 여파로 모두가 조심하는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예매한 표를 출력하다 보니 뭔가 길게 나오는 것이 평소와는 다르다 싶어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출입 관련 개인정보 입력 및 동의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렇지... 눈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예매처 넓은 홀 한쪽에 놓여 있는 여러 개의 탁자는 그런 용도인 것이다. 필기도구와 손소독제가 같이 비가 되어 있었다.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스윽 둘러보니, 나이 때가 있는, 모녀 또는 부부가 있었고, 간혹 젊은 연인도 섞여 있었다. 널찍하고 한산한 관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영화가 어떤 내용인지,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자못 궁금해했다.
불이 꺼지고, 짧은 광고가 끝나고 나서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었다. 개봉 전부터 우리의 배우들이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여러 분야에서 상을 탔다고, 매스컴에서 이야기를 쏟아낸 후라 나는 그 내용이 아주 궁금하였던 것이다.
1980년대 미국에 이민을 가서 정착하기까지 힘든 여정을 보낸 젊은 부부와 그 가족의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뒤에서 소곤소곤 거리며, "나도 들었는데, 정말 저런 적이 있었대~"라며 내용에 대해 심히 공감하는 대화가 오고 가는 것이 들려왔다. 어떤 장면에서는 웃고, 어떤 장면에서는 가슴을 졸이며 이야기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니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 엄마도 저렇게 하셨는데... 그리고 미국에 살고 있는 셋째 언니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렸다. 또 다른 지역, 다른 가족들이지만,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 이민을 와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며 정착을 하였는지 언니로부터, 언니의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나보다 네 살 위였던 언니는, 새침하고 감수성이 예민하였으며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문학소녀였었다.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었던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를 꺾고 대학교에 들어가더니, 어느 날부터는 영어를 배운다고 영어학원에 가기 시작하였다. 어느 순간부터 미국 남자와 사랑에 빠지더니 21살 무렵에 미국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당시로는 정말 파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국제결혼이 요즘처럼 흔한 일도 아니었던 때였고, 고지식하고 엄격한 그야말로 호랑이 같았던 아버지의 허락을 득하고(!) 떠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형부가 처음 우리 집에 인사를 올 때, 우리 모두는 긴장했었다. 과연 아버지가 이 만남을, 이 결혼을 허락할 것인가를 두고 모두가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번에 O.K 사인을 날리셨다. 모두의 생각을 깨고 미국 사윗감이 마음에 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언니는 꿈 많은 대학생활을 뒤로하고, 21살 어린 나이에 기대와 부푼 꿈을 안고 그렇게 낯선 땅, 미국으로 날아갔다. 해마다 어머니는 고춧가루며, 마른 멸치며, 미역이며... 한국이 그리울 언니에게 보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바리바리 싸서 보내주곤 하셨다. 운 좋게도 미국에 계신 시부모님은, 어린 나이에 자신의 아들 하나만 믿고 멀고도 먼 낯선 땅 한국에서 온 조그마한 동양 여자를 딸처럼 사랑으로 맞아 주셨고, 언니는 사랑받는 맏며느리로 살게 되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언니는 맏며느리로, 아내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하며, 한 가정을 아우르며 잘 살아가고 있다.
언니는 분명 한국이, 고향이, 어머니가, 형제자매와 친구들이 몹시도 그리웠을 것이다. 그런 언니는 멀리 있는 친정 식구에게 자주 손편지를 보내왔고, 우리는 그 편지를 읽으면서 언니의 안부를 확인하곤 하였다. 간혹 국제전화를 걸어올 때엔, 아버지와 어머니는 돈 많이 든다고 빨리 끊으라고 재촉을 하기도 하셨다. 미국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가늠하면서...
건강하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한동안 방황하였다. 일만 하면서 바쁘게 살다 보니, 놓친 게 너무도 많은 것 같았고, 어머니와 다정하게 여행한 번 제대로 가 본 적이 없는 것이 가장 후회가 되기도 하였던 시기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혈육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나는 언니에게 언니가 사는 모습이 보고 싶다고 했더니, 언니는 흔쾌히 수락하였다. 어머니를 떠난 보낸 후의 울적한 마음이, 언니를 보면 위로가 될까 하여 나는 그렇게 장거리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물론 언니는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가끔씩 친정나들이를 오기도 하였다. 형제자매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고 직장인이 되었을 때는, 업무차 미국의 어느 지역에 갔다가 언니의 집에 들렀다 온 적이 있기도 하였다. 그때 언니가 아주 아주 좋아했다고 남동생이 말해 주었다.
긴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시카고 공항에서 나를 마중 나온 언니 부부의 밝은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긴 세월을 넘어 편지와 전화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던 언니의 세계는 다정다감하면서 다채로웠고, 친절하였다. '아, 언니는 이렇게 살았구나.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구나!' 하면서 내심 감탄을 하기도 하였다.
오랜만에 마주한 자매는 함께하면서,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
언니의 긴 시간 속에는 두려움과 불안함,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항상 있었던 것 같았다. 마음 한편으로는 함께 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고, 안타깝기도 하여 언니의 등을 토닥이기도 했었다. 다행히 언니에게는 옆에서 지켜봐 주고, 기다려주고, 따뜻하게 품어준 형부와 시부모님이 계셨고, 언니의 소녀 같고 격의 없는 친절함으로 맺어진 여러 명의 친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야, 그거 아나? 엄마가 언니 집 다녀오시고 나서,
느그 형부는 참 변함없는 사람이다."
라고 하셨거든.
그렇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 두 번 정도 언니 집에 다녀오신 적이 있었는데, "나는 느그 언니 걱정은 안 하기로 했다!" 하신 적이 있으셨다. 어머니의 그 말씀 안에는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셋째 사위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있으셨던 것이었다.
"니 형부는 클래식이야! 정말 구닥다리라고!" 하며 언니가 불만스러운 어투로 대답하기도 하였다.
언니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때는 내가 어렸을 때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언니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엄청 예민하고 불안해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랬겠지, 얼마나 무섭고 불안했겠어. 사랑에 빠진 그 남자 외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 낯선 땅에서 말도 잘 안 통했을 텐데... '
언니는 미지의 땅, 미국에서 형부만 믿고 적응해 가면서 생활할 때 철칙처럼 머릿속에, 가슴속에 새긴 말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어머니가 어린 딸을 낯선 땅으로 보내면서 하신 말씀으로, "정직하게, 진실하게 시부모님 모시고 잘 살아야 한대이. 여자는 결혼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일부종사(一夫從事) 해야 한대이." 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일부종사(一夫從事)! 한 남편 만을 섬김'이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구 시대 유물 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에 나의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하긴 우리 어머니는 옛날 사람이셨지. 언니는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어머니의 이 말씀을 되새기면서 여러 번의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언니가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시간을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짠 해지고, 코 끝이 시큰해지기도 하였다.
언니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마치도 부적처럼, 긴 여정 중 밤하늘에 반짝이는 북두칠성처럼 가슴에 새기면서 그렇게 여러 날을 보냈던 것이다.
영화 속에 어머니처럼 바리바리 싸서 내어 주고, 가진 돈 다 털어 주고, 더 줄게 없나 살피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인 것 같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오늘따라 가슴 시리도록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