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실은 커다란 버스가 내 코를 베어가듯 빠앙 하고 스쳐 지나갔다. 나는 6차선 도로 사이 작은 보도블록의 끝선을 밟고 서 있었다. 그 자리에 마저 꼿꼿하게 서있으려는 관성 때문에 다리만 땅에 박힌 채로 당연히 몸이 기울어 휘청거렸고 중심을 잃은 몸통이 균형을 찾을 때까지 괜한 몸서리와 함께 알 수 없는 기억이, 버스가 지나간 반대방향으로부터 흘러왔다. 딱히 환청이랄 것도, 환각이랄 것도 없는, 기시감에 가까운 한 풍경이 눈앞에 머물다 지나갔고 그 순간은 실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 마냥 나를 뚫고 지나선 그 길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기억과 감각의 세기도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었다. 오늘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어제와 같이 또 내일과 같이 해야 할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 사람으로서 자녀로서 친구로서 다 해야 할 도리, 일일이 따져보기에는 너무 많고 많은 의무로 여겨지는 나의 역할들. 오늘은 조금 더 무거운 일들. 그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나를 향해 총알이 연발 날아온다. 내게 뭔가 갈겨대는 상대방과 마주 서서 고개를 쑤욱 내밀고 한참을 그를 쳐다보는데, 아무리 봐도 그가 대체 적군인가 아군인가 그것을 알 수가 없어 어지럽다. 침침한 눈을 비비며 자꾸 그것을 차근차근 뜯어보려고 해도 나는 그 새의 형태도 종류도 알 수 없음에 더욱 혼란을 겪는다.
갈까 말까, 애써 주변을 빙빙 돌며 애 먼 방향으로 발길을 틀어보지만 엉뚱한 길로 향하려던 시도가 이끄는 길들은 정작 내가 가야만 하는 목적지로의 궤도 밖으로 벗어나질 못한다. 글쎄, 오늘은 유독 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감각을 덥석 믿고서 무작정 도망치고 싶다는, 그냥 그런 실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 지루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