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대화를 하다 보면 불편해지는 사람이 있다. 내게는 주로 사실관계를 정확히 짚고 넘어가려는 유형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사실 집착은 내가 감탄하거나 감동하고 있는 감정의 정확도를 훅 떨어뜨린다. 그럴 때 나는 눈을 흘기며 느린 어투로 묻는다. “너 MBTI T니?”. 그리고 이 T형 사람 중에서는 유난히 F형의 사람들이 느끼는 방식을 사랑하는, 마치 바닷속 인어공주가 육지의 왕자를 사랑하여 꼬리를 양갈래로 찢는 아픔을 감수하듯이 그들에겐 없는 감정을 배우고자 감정의 세계로 노크하는 자들이 있다. 내게 그런 친구가 있다.
내 친구 김재수는,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별명이 알파고였다. 스스로의 평가에서도 본인이 뚝딱거린다는 표현을 자주 썼고, 연애상담을 하다 보면 남녀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이 말들에 편견이 가득하다는 걸 알지만 재수는 들으면서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는 0과 1의 세계라면 F형인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는 0.1의 촘촘한 격자가 있는 세계. 자신도 그들과 같이 보고 느끼며 더욱 친밀해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재수는 나에게 종종 물었다. 이 그림 보면서 너는 무슨 생각을 해? 넌 어떻게 느껴? 그럴 때마다 나는 알파고가 딥러닝하듯이 재수가 감정을 배우려는 모습이 귀엽고 짠했다.
재수와 통화는 짧으면 한 시간, 길면 두 시간이었다. 서로가 전 남자 친구에게 감정이입하며 ‘아마 걔는 이래서 그랬던 걸 거야’라는 결론을 내리되, 그 과정에서 우리가 못나서 헤어졌던 건 아닐 거라며 그들이 주지 못했던 이해와 위로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아픔이 아련해지고, 아련하다 웃겨 깔깔거릴 수 있을 때까지 떠들어댔다. 재수가 미국으로 한 달 반 정도 여행을 갔던 때에도 우리는 11시간 시차에 아랑곳 않고 연락을 이어나갔다.
재수는 미국에 가서도 F형인 인간들에게 상처받고, 그러나 지독하게도 그들을 좋아하는 중이었다. 미국에서 같이 지내는 사람들과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던 날, 재수는 나에게 울고 싶다고 말했다. 이해만으로도 버거운 재수에게 마음을 몰라준다며 쏘아붙이거나 은근한 손절의 뉘앙스를 풍길 때 재수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거절받는 경험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다. 감정에 무디다 해도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그리고 재수가 아프다고 할 때에는 정말 아픈 거다. 모기에 물려도 뱀에 물린 것처럼 깜짝깜짝 큰일 난 것처럼 반응할 수 있는 F와는 달리, 정말 있는 만큼 혹은 덜 표현할 줄 밖에 모르는 재수니깐 말이다.
재수에게는 강한 이성이 있다. 그녀도 알았다. 이렇게까지 힘들면 본인이 절교를 선포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재수는 현명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그녀는 두 가지 방식을 모두 알고 있었고, 본인에게 이로운 걸 택했다. 그리고 재수의 결정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 같은 사람은 일일이 말하지 않고도 통하는 사람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해.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은 너처럼 진득한 사람도 좋아해. 이런 변덕에도 다 괜찮다고 하는 너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마음 놓고 변덕을 부리거든. 그 사람들도 결국에는 알게 될걸? 네가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지. 근데 오늘은 내가 다 미안.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아야 하는 나 같은 사람들로 너무 상처받게 해서, 내가 대신 미안”
그날 나는 또 F가 F했다 할 만큼 재수가 F형 사람을 더 좋아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나에게 위로를 참 잘한다고 했다. 그런데 감정의 정확도를 따지는 나의 입장에서 그건 ‘아니’다. 나는 위로를 잘하려던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그걸 나는 진심이라고 말한다. 재수는 여러 해 동안 감정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별의 순간에도 감정을 직시하는 재수를 보면 과다출혈이라 할 만큼 크게 아플지언정 회피하지 않았다. 그 어려운 걸 해내는 와중에 감정형 인간들에게 혼이 나고, 관계단절에 위협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그걸 하겠다는 친구에게 나는 전형적인 감정형 인간으로서 미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노력이 오로지 그녀가 F형을 좋아해서겠지만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임을 알아서 고맙다고, 덕분에 나는 너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게 된다고 했다.
재수의 노력에 언제가 너도 감정형 인간이 될 거란 말은 필요 없었다. 그녀 주변의 대표적인 감정형 인간인 나는 재수가 점점 더 편안해지고 좋아졌다. 내 변덕을 자유롭게 하는 그녀를 이제는 오히려 내가 더 놓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가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어버렸음을 나의 민감한 감각수용기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또 있는 그대로만큼 말했다. “재수야, F인 내가 많이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