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김양은 결혼 후에 자기주장이 명확해졌다. “언니, 나는 이게 먹고 싶어”, “언니, 그건 좀 별로다” 김양의 분명해진 표현력을 두고 결혼하더니라고 말할 때, 덧붙이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는 게 훨씬 편안해 보인다고 안정감에 본성이 발현되는 거라면 나도 할래! 결혼! 또 다른 내 친구 김양은 배려의 여왕이다. 약속을 정하면 만나고 집에 돌아가는 과정까지를 고려해 우리가 어디서 만나고,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서 숙고한다. 이때 지하철과 버스 시간, 할인 쿠폰, 우리가 만났을 때의 하늘 풍경과 바람, 기분까지 실용과 낭만 모든 게 고려 요소다. 그녀가 배려의 여왕인 건 자기 한 사람을 두고 생각해도 복잡할 일을 상대가 둘이면 둘, 셋이면 셋 모두를 고려한다는 점이다. 배려의 차원이 남다른 김양은 따라 할 엄두가 안 난다.
퇴근 후 밥 먹으며 친구와 통화 중이었다. 눈치 보지 말고 살자는 말을 하던 중에 불쑥 대화 언어를 영어로 바꿨다. 친구는 영어로 답하면서 갑자기 왜 영어냐고 묻는다. 나는 그러고 싶어서라고 답한다. 손님이 나뿐인 가게에서 대단치 않은 영어 문장은 가게 직원에게 한국말처럼 쏙쏙 들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i don’t care”하고 싶었다. 방금 전까지 한국어로 이야기하다가 아무렇지 않게 영어로 이야기하는 상황이 웃겨서 너랑 즐겁고 싶다고 했다. 친구는 이내 안될 거 없다는 “there is no reason”으로 응답한다.
갑자기는 예상치 못한 순간이다. 한국말하다가 영어로 얘기한다고? 갑자기?라는 당황스러움이 웃음으로 유발될 때, 마치 자몽을 먹는 것 같다. 쌉쌀한데 단맛이 돌고 거기에 상큼함마저 도는 다채로운 그 맛처럼 말이다. 나는 이럴 때 쾌감을 느낀다.
이거랑 이건 뭐가 달라요? 질문으로 얻는 건 다음에라는 작아지는 마음 대신 물었다는 단순함과 큰 음성이다. 이쪽에 확실히 더 쾌감이 있다. 해버리기, 이왕이면 적극적으로 해버리기. 주저함으로 소멸하는 마음에 답답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 첫 번째 친구 김양처럼 본성을 거스르지 않되, 두 번째 친구 김양과 같이 나만 생각하지 않기.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이맛살과 잔주름이 아닌 눈가주름에 기여하는 말이라면 해서 속 시원한 나와 들어서 웃긴 너와 우리.
최근에 가장 행복한 날들은 이런 시간이었다. 호우주의보에 사거리 신호등에 사람이라곤 없고, 빗소리가 모든 소리를 잡아먹을 때, 우산 아래에서 머리카락도 젖고, 구두도 젖고, 가방도 젖었지만 에라 모르겠다며 노래하며 걸어갈 때, 우울한데 왜 살아야 하냐는 친구한테 남의 일이니깐 쉽게 말한다며 우울한 거랑 왜 사냐가 왜 연결되냐며 논리적인 척하지 말라고 병 주고 약 줄 때. 순간순간 찰나의 반전, 아무 말 아무 이야기가 만든 틈새로 딱하고 지루해 맛없는 하루에 리듬과 흥을 돋운다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