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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계꽃 Dec 22. 2024

타인의 말은 내게 언제나 오해 1

네 번째 키워드, 진심

 감가상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산의 가치가 감소한다는 경제학 용어다. 검색하니 토지를 제외한 유형자산에 적용된다고 한다. 중고 거래 앱에서 아무리 민트급(새것에 가깝다는 뜻)을 강조한다 해도 새 제품과 동일한 가격에 되팔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할 때 남자는 집, 여자는 혼수”라는 말은 누군가 고의로 퍼트린 음모가 틀림없다. 자매들이여, 무조건 집, 부동산, 땅이다. 재산 분할 시 내가 장만한 혼수의 가치가 반토막(혹은 그 이상...) 나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면 소중한 나의 돈은 집에 보태도록 하자.


 언어에도 감가상각과 같은 법칙이 있다. 과유불급이다. 아무리 좋은 표현이라도 너무 자주 사용하면 진부한 클리셰로 전락한다. 한때 출판계를 휩쓴 '힐링', '다정', '무해'가 그랬고, 지금은 자기 계발 담론을 중심으로 한 '나다움'이 그런 듯하다. 그만큼 중요하니 자주 쓰는 것일 텐데, 안타깝게도 지루함과 진부함은 언어의 목적인 소통을 가로막는다. 그런 측면에서 '사랑'과 '진심'은 진부하면서 오해하기 쉬운 말이다. 고리타분하다 못해 소음처럼 느껴지는 한 마디, "사랑해, 진심이야." 사랑과 진심이 담을 수 있는 맥락의 가짓수만큼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이 문장의 화자와 청자 사이에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든 이 거리를 좁히려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잠실 주경기장을 꽉 채운 5만여 명의 팬들 앞에서 "믿어주세요"라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2019년 4월 방탄소년단은 <MAP OF THE SOUL: PERSONA>라는 미니앨범으로 컴백해 한 달 뒤 미국 LA를 시작으로 Speak Yourself 스타디움 투어를 돈다. 2018년 방탄소년단의 존재가 머리에 각인된 후 꽤나 오랫동안 입덕 부정기를 겪다 1년이 지나서야 아미(ARMY, 방탄소년단의 팬덤명)임을 인정한 늦덕으로서 컴백하자마자 이역만리 타국으로 떠나버린 내 가수에게 왠지 모르는 섭섭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물론 멤버 7명이 돌아가며 라이브 방송을 켜주고, 여름에 그 바쁜 스케줄 속에서 한국 팬미팅 공연을 따로 빼놓을 만큼 국내 팬들에게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 주었지만, 아직 신뢰와 유대감이 단단하게 쌓이지 않은 입덕 초기 팬은 그런 그들의 노력이 눈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한국에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The Final이라는 부제를 달고 10월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에서 3일 간 콘서트를 진행한다는 공지가 떴다. 아! 지민의 솔로 무대를 직접 볼 수만 있다면! god 이후로 너무 오랜만에 아이돌 판에 돌아온 중고 신입 덕후는 바뀐 인터파크 시스템에 어리바리 정신을 못 차렸고 결국 티켓팅이라는 전쟁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지금은 거의 모든 아이돌 가수가 온오프라인 콘서트를 동시에 진행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보편적이진 않아서 웸블리 콘서트처럼 서울 콘서트도 온라인 동시 송출로 진행해 주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스크린 속 방탄소년단은 빛났고, 최애 지민의 세렌디피티 무대는 예술이었고, 주경기장을 꽉 채운 아미밤의 불빛은 아름다웠다. 온라인 송출은 3일 중 첫날 공연만 해당되었기에 둘째 날과 마지막 날 공연은 트위터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클립을 보며 방구석에서 달래 지지 않는 아쉬움을 억지로 달래야 했다. 세계적인 슈퍼스타를 덕질하는 건 어렵구나. 콘서트 가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라니. 다음 콘서트에는 갈 수 있을까? 늦덕이라 서럽네. god만큼 방탄소년단에 대한 마음이 오래갈 수 있으려나. 2019년 10월 29일이 없었다면 그들이 전하는 사랑과 진심은 소음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월드 투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 리더 남준(RM의 본명. 항상 남준이라 부르기에 글에서도 예명 대신 본명을 쓰고자 한다)은 눈물을 가득 머금은 눈동자로 아미들에게 진심을 전했고, 나는 앞으로 내 인생에서 방탄소년단이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을 알았다.


"이 많은 시간, 이 많은 일들 뒤에 지금 이 Love Yourself (투어)가 끝나고도, 저는 김남준이 김남준일 수 있었으면 좋겠고, 방탄이 방탄일 수 있었으면 좋겠고, 또 여러분이 여러분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거 꼭 알아주시고요. 여러분 덕분에 저는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어요. 믿어주세요.

앞으로도 저희의 단 한 마디, 가사 단 한 줄이라도, 여러분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고요. 앞으로 저희가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더라도 같이 함께 합시다.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진짜 정말 사랑합니다. 알아주세요."




최애 멤버가 남준으로 바뀌는 건 자연스러웠다(지민아 여전히 널 사랑해). 사실 최애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김남준이라는 사람은 내게 K-POP 아이돌 가수, 방탄소년단의 최애 멤버 차원이 아니다. 닮고 싶은 사람이자 되고 싶은 사람이고, 영감을 주는 사람이자 존경하는 사람이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데 남성의 무의식적 여성성을 아니마, 여성의 무의식적 남성성을 아니무스라 부른다. 다른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아니마, 아니무스 역시 나름의 발달 단계를 거친다. 마지막 발달 단계에 해당하는 아니무스는 타인에게 정신적 기쁨과 만족을 주는 남성상으로 영적인 진리의 세계로 안내해 주는 이미지의 원형이라 배웠다. 이 강의를 듣는 내내 김남준이라는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를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건 남준이 쓴 가사와 노래가 진짜로 나를 살렸기 때문이다. 죽음과 삶, 종속과 자유, ‘역할로 정의된 나’와 ‘있는 그대로의 나’의 경계에서 방황할 때마다 남준은 북극성이 되어 주었다. 두 번 다시 방향 감각을 잃지 않도록 나는 어깨와 팔, 발목에 그가 가르쳐준 것들을 새겼다.


대중이 떠올리는 RM의 이미지에는 똑똑함, 현명함, 리더로서 훌륭한 자질, 화려한 언변과 끝내주는 랩 실력, 영 앤 리치, UN에서 연설한 아이돌, 미술 애호가 등이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이러한 면면을 아끼고 좋아한다. 하지만 마음을 울리는 단 한 가지 모습을 꼽으라면 남준의 평정심이다.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의 농간에 휘말리는 시기가 아니라도 자극을 워낙 큰 폭으로 느끼는 기질이다 보니 땅이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추락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그가 뭐랄까, 가끔은 어떤 초월적 존재로 느껴졌다. 사람이 이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구나. 2022년 12월에 발표한 남준의 첫 공식 솔로 앨범 <Indigo>는 내가 투사한 그의 환상에 상당히 가까운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RM의 첫 공식 솔로 앨범 <Indigo>의 컨셉 포토. 출처: 빅히트 뮤직


타는 불꽃에서 들꽃으로, 소년에서 영원으로
나 이 황량한 들에 남으리
언젠가 나 되돌아가리
- RM, <들꽃놀이> 가사 중



<Indigo>는 빌보드 200 차트에서 5위까지 오를 만큼 큰 성공을 거뒀다. 홍대 롤링홀에서 소수의 팬들과 미니 콘서트를 마치고 난 후 그는 라이브 방송에서 쉬지 않고 이어서 다음 앨범 작업에 착수한다고 말했다. 다음 앨범은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이 담겨 더 재미있을 거라고, 기대해도 좋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 2023년 겨울 그는 입대를 했고 2024년 5월 드디어 기대하라며 장담한 두 번째 솔로 앨범 <Right Place, Wrong Person>이 발매되었다. 선공개 곡 <Come back to me>가 첫 번째 앨범의 연장선 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전체 음원이 공개되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모든 음원이 공개된 5월 24일, 두근거리며 첫 곡을 재생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두 번째, 세 번째 트랙으로 넘겨도 이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중간 트랙까지 왔을 땐 예약 구매한 실물 앨범을 취소할까 싶었다. 아니 내가 아는 김남준이 맞아...?!


예의상, 팬심으로 전곡 재생을 한 두 번 더 했을까. 두 번째 앨범은 그냥 그렇게 내게 잊혀졌다. 뒤늦게 받은 실물 앨범도 스윽 펼쳐보고 그대로 책장에 꽂아두었다. 1년 5개월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내가 변한 건지 그가 변한 건지, 도무지 이번 앨범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전하고 싶은 마음이 뭔지 묻고 싶었지만 군대에 가 있는 사람이 대답할 순 없었다. 클래식함을 추구하던 그가 정녕 대중 예술에서 순수 예술의 끝까지 가버린 걸까.



RM의 두 번째 앨범 <Right Place, Wrong Person>의  컨셉 포토. 출처: 빅히트 뮤직


난 스님은 못 돼
타인의 말은 내게는 언제나 오해
이제 좀 살만하니 뭔 책임을 떠 넣네
내가 뭘 대표해 나는 나만 대표해
- RM, <Groin> 가사 중



남준은 자신을 지켜봐 주는 사람들에게 진심을 전하려 애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 본인이 쓴 가사처럼 우리에게 타인의 말은 언제나 오해가 되고, 우리의 말도 타인에게 늘 오해가 된다. 설령 그 타인이 나를 열렬히 사랑해 주는 팬이라 할지라도. 잊혀진 이 앨범을 다시 꺼내보고, 그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의 진심을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건 가을께였다. 여름에 대상포진으로 입원하고 세웠던 모든 계획을 보류하며 고통이라는 감정을 진지하게 성찰하면서부터 남준의 두 번째 앨범이 다시 내게 현상했다. (다음 편에 계속)



* 덕심이 너무 깊어 이번 글은 두 차례에 걸쳐 올릴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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