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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계꽃 Dec 01. 2024

숲과 바다, 일기장과 겉옷

두 번째 키워드, 결핍

사랑이란 도대체 뭘까. 사탕처럼 달콤하다는데, 하늘을 나는 것 같다는데. 뇌과학에서 사랑은 도파민이나 세로토닌, 옥시토신 등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화학작용일 뿐이다. 한편 정신분석학은 리비도(성적 추동)가 삶의 본능이라 말했다. 구강기, 항문기,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등 심리학을 몰라도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 용어들은 우리의 성적 에너지가 어디를 향해 있는가에 따른 인간의 발달 단계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인지적 관점에서 사랑은 7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이것이 인지심리학자 로버트 스턴버그의 '사랑의 삼각형 이론'이다.


출처: 서울시50플러스포털. 당신은 어떤 사랑을 하고 있나요?



그림에서 볼 수 있듯 사랑은 열정과 친밀감, 헌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정이 사랑에 포함되는 이유는 사랑에 친밀감이라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술을 마시고서)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왜 너 같은 남자는 현실에 없는 거야?!" (아직 못 찾아서, 라고 믿고 싶다 진심으로.)


덕후의 사랑은 어디에 속할까?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는 명대사를 남긴 드라마 <굿파트너>의 불륜녀 최사라는 이 한마디로 온갖 멸시와 조롱을 받았지만, 덕질의 맥락에서 상당히 맞는 말이다. 느닷없이 덕통사고(덕후 + 교통사고)를 당한 후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일 뿐'이라는 사실만 확인하게 되는 입덕 부정기를 거쳐, 최애에 감기고 차애에 치여 끝내 모든 알고리즘을 점령당하는 과정이 바로 머글에서 덕후로 태어나는 순간 아니던가.


첫 만남에 열정의 케미스트리가 파바박 튄 후 친밀감을 바탕으로 끈끈한 정서적 유대를 맺어 가는 사랑. 사랑에 있어 나의 추구미이자 이상이다. 지금까지 연애 패턴을 돌아봐도 그렇다. 다시 말해 첫 만남에 이성으로서 성적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으면 영원히 느낄 수 없는, "친구에서 연인으로"는 내게 이번 생에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인 셈이다. 그런데 덕질의 패턴도 이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덕통사고는 언제나 이 한 마디로 시작한다. "와, 섹시하다!" 이후 손가락이 저절로 영상을 클릭하고 눈이 충혈되도록 새벽까지 알고리즘을 타고 또 타는 부정기를 성실하게 거치며 친밀감을 충분히 쌓으면 마침내 입덕을 수긍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하지만 여기서 방심하면 안 된다. 입덕 후 어떤 형태로든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지 못하면 결국 오래 가지 못한다. 학창시절 열렬히 사랑했던 J-POP 아이돌과도 그렇게 끝이 났다. 헤어진 이유도, 이혼한 사유도 사랑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본질은 같다. 상대와 정서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 그 사랑은 끝난 것이고 나는 헤어질 결심을 한다.




버추얼 아이돌 PLAVE(플레이브)를 알게 된 시기는 아직 추위가 꽃을 시샘하는 3월이었다. 트랜드 관련 영상을 본 탓일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유튜브 알고리즘에 K-POP 아이돌의 역사를 요약해주는 영상이 나타났고, 덕후에게 아이돌 역사 강의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콘텐츠였다. 서태지와 아이들로 시작해 1세대를 거쳐 5세대로 넘어 오자 충격적인 이야기가 들려 왔다. 요즘 버추얼 아이돌의 인기가 상당한데, 그중 플레이브라는 그룹이 얼마 전 공중파 음악방송에서 1위를 했단다. 버추얼 아이돌?! 그 옛날 사이버 가수 '아담'같은 건가? 사이버 가수가 공중파 음악방송에서 1위를 한다고?! 아무리 AI가 대세라지만 이게 무슨 일이지? (우리 플레이브 AI 아닙니다. 뒤에 사람 있어요!) 직접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겠다 싶어 해당 영상을 중지하고 플레이브의 미니앨범 2집 타이틀 곡 <WAY 4 LUV>의 음악중심 무대 영상을 재생했다. 러닝타임 3분 50초가 지난 후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이미 서술했다.



출처: MBCkpop 유튜브 채널. 버추얼 아이돌 그룹 PLAVE의 리더 예준.


지금까지 이런 덕통사고는 없었다. 무대 영상을 본 후 팬튜브 계정의 오류 영상(기술 결함으로 발생한 오류, 이를 테면 갑자기 공중부양을 한다든지 목이 꺾인다든지 하는 모습들을 엮은 영상으로 플레이브 입덕 루트 중 하나다) 몇 개를 연달아 봤다. 그날 저녁 바로 위버스(팬 커뮤니티 플랫폼)에 가입했고, 이틀 후 이들의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실시간으로 시청한 뒤 모든 멤버의 버블(아티스트와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소통할 수 있는 앱)을 구독했다. 그렇게 입덕 부정기도 없이 그야말로 눈 감았다 뜨니 어느새 PLLI(플리, 플레이브의 팬덤명)가 되어 있었다.


버추얼 아이돌의 특성상 팬들과의 소통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런 제약에 아쉬움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스테룸이라는 외계 공간에서 지내며 테라(지구)에 있는 팬들의 사랑이 있어야 존재한다는 그룹의 세계관처럼, 플레이브와 플리의 관계는 만날 수 없다는 제약에서 발생하는 서로에 대한 '애틋함'이 기본 정서로 깔려 있다. 오히려 이 애틋함이 다른 아이돌 팬덤에서 찾기 어려운, 플레이브와 플리가 공유할 수 있는 특별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버추얼 아이돌이지만, 또 버추얼 아이돌이라서 급속도로 친밀감과 정서적 유대감을 쌓을 수 있었다. 특히 최애 멤버인 예준이 팬들에게 주는 사랑에는 사막처럼 황량하고 메마른 마음에 새싹을 틔우고 나무를 키우고 숲을 이루게 해주는 힘이 있다.




리더 예준은 그룹 내에서 1등 신랑감이라 불릴 만큼 생활력이 강하고 야무지며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그는 버블이나 위버스를 통해 잠은 잘 잤는지, 밥은 잘 챙겼는지, 식후 커피는 마셨는지, 혹여 비라도 오면 비 맞지 말라며 우산은 챙겼는지, 자기 전 오늘 하루 어땠는지 등 거의 매일 팬들에게 안부 인사를 전한다. 퇴근 후 소파에 낡고 지친 몸을 누이면 예준은 "저녁 챙겨 드셔요"라는 메시지를 보내 오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즈음엔 "저는 이제 누웠습니다 ~.~ 플리 오늘 하루 어땠어? 저는 플리 덕분에 행복했지요~"라고 말을 걸어준다. 한편 이 사람이 예능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라이브 방송에서 보여주는 맑눈광(맑은 눈의 광인) 모먼트도 있다. 다채로운 모습으로 팬들과 상호작용하는 예준의 모든 면면이 사랑스럽지만, 무엇보다 음악을 매개로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 가장 깊은 사랑을 느낀다. 봄비가 내리던 주말, 예준은 창문 열고 Laufey의 <Dreamer>를 듣고 있다며, 함께 차 마시며 같이 듣자고 버블 메시지를 보내왔다. 노래가 끝나자 또 다른 곡을, 그 곡이 끝나면 또 다음 곡을, 이렇게 약 1시간 동안 10곡을 함께 들었다. 가을이 떠나기 전 11월의 어느 주말에는 날이 너무 좋다며 함께 산책을 가자고 했다. 이 메시지를 읽고 찔끔 눈물을 흘렸는데, 이틀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침대 안에 틀어박혀 있다 막 거실로 나온 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2시에 함께 밖을 나섰고, 나는 집 주변 가로수길의 단풍과 은행을 눈에 담으며 햇살을 맞이했고, 예준은 같이 노래를 듣자며 로꼬의 <남아 있어>를 선곡했고, 나는 공원의 흙길을 걸으며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 여름"을 추억했고, 그렇게 4곡을 같이 들으며 만추를 만끽했다.


강릉 안목 해변의 모래 사장에 앉아 한참을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만 진정 평온함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던데. 오후 1시, 아직은 가을볕이 따가웠던 날, 동해 바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짙은 청색과 녹색 빛깔의 물결은 준비할 틈도 주지 않고 나를 과거로 데려갔다. 2020년 10월, 이 해변도 그대로고, 우리가 좋아했던 가게도, 소품샵도, 호텔도 그대로 있는데, 그 사이 사람만 너무 변해버렸다. 4년 전의 난 이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더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림이, 어떤 장면이, 누군가의 표정이 느닷없이 소환되었다. 맺힌 눈물을 애써 삼키려 하지 않았다. 문득 삶이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어서 조금 허무하기도 하고, 인간이 합리성을 무기로 아무리 무장해봤자 자연 앞에서는 그 취약성을 감출 수 없음에 마음이 저릿해서 바닷 바람이, 가을볕이 맺힌 눈물을 거둬가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을 앉아 바다를, 너울을, 수평선을 응시하며 파도에서 심해로 나아가고 싶다고, 바람의 결을 따라 파도를 밀어내 한번 거세게 몰아친 후 다시 잠잠해지는 깊은 바다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산책하자는 메시지를 보내기 하루 전, 예준은 팬들에게 최유리의 <숲>을 커버한 노래를 선물했다. 심해로 나아가고 싶다는 바람과 달리 나는 이따금 찾아오는 지독한 외로움의 파도에 잡아 먹혀서 밑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스스로 만든 어둠에 스스로를 가둬 놓고 있을 때면 예준은 늘 음악으로 빛을 비춰 준다. "세상과 다른 눈으로 나를 사랑해주는"으로 시작하는 <위로>, "아무런 말 없이 그대 쉴 수 있게 내가 늘 있을게요"라며 그 모든 순간은 <우리가 맞다는 대답을 할 거예요>, 그리고 이번에는 "아 바다라고 했던가 그럼 내 눈물 모두 버릴 수 있나"라는 가사를 꼭 플리에게 전하고 싶었다며 "바다가 되어 드릴 테니까 플리의 눈물 모두 저에게 버려 주세요 언제든지ㅎㅎ"라고 전했다. 바다가 되고 싶지만 마음의 그릇이 부족해 파도에 부서지고 또 부서지는 사람에게 바다가 되어주겠다는 그의 말은 그저 사랑이었다.



여러 면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상처받은 방식에 의해 정해진다.
- 마리 루티, <가치 있는 삶> 중에서


 

예준의 <숲> 커버 영상에 이런 댓글이 달려 있다. 예준이 이런 종류의 (비슷한) 노래를 많이 불러주는 이유는 본인이 가장 듣고 싶었던 위로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덕후라면 "최애는 모성애, 차애는 이상형"이라는 말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사랑의 역동에는 언제나 (무의식적인) 결핍이 끼어든다는 측면에서 일리 있는 말이라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최애를 사랑하는 방식은 내가 간절히 원하는, 가장 받고 싶은 사랑의 형태(결핍)에 가까웠다. 나의 무의식이 투사한 환상이라 해도 상관 없다. 어차피 사랑은 환상에서 시작되니까. 다음 날 라이브 방송에서 예준은 플리를 사랑하는 10가지 이유 중 하나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줘서"를 꼽았다. 나는 안다. "있는 그대로"와 "사랑해준다"를 연결 짓는 사람의 마음에 한 때 어떤 생채기가 났었는지를. “사랑해”를 "일기장처럼 그냥 그냥 다 얘기해줘 다 보고 다 공감해줄게요"로 표현하는 사람이 한 때 어떤 눈물을 흘렸었는지를. 어쩌면 우리가 비슷한 질감의 슬픔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니 조금 덜 외로워졌다. 쌀쌀한 날씨에 "편하게 걸칠 수 있는 겉옷"이 되어주겠다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주고받는 감각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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