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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계꽃 Dec 29. 2024

타인의 말은 내게 언제나 오해 2

네 번째 키워드, 진심

건강에 관해선 운이 좋은 편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추운 겨울을 날 때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고(20대의 젊음이라는 후광 효과를 등에 업었지만), 팬데믹 시기에도 백신을 맞은 후에 코로나에 걸린 터라 크게 고생하지 않았다. 팔다리가 부러진 적도 없었으며, 큰 수술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대상포진이라니. 남들은 팔다리, 허리 쪽으로 온다던데, 고약하게 왼쪽 얼굴을 강타한 바이러스는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통을 선사했다. 전조 증상으로 찾아온 두통은 정수리부터 왼쪽 눈썹 부근을 몇 초 간격으로 날카롭게 찔러댔고, 타이레놀은커녕 병원에서 처방받은 진통제도 소용없었다. 48시간을 두통과 안구통에 시달리다 사흘 째 되던 날 통증 부위에 수포가 올라왔다. 안면 대상포진은 잘못하면 실명에 마비까지 올 수 있으므로 동네 의원에선 입원 치료를 권유했다. 위급 환자도 제때 응급실에 가지 못해 사망했다는 뉴스가 쏟아지는 마당에 입원이 가능할까 싶었지만, 점점 눈꺼풀을 뒤덮는 수포와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통증으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지역 2차 병원 응급실로 가 무작정 대기했고, 천만다행으로 그날 퇴원 환자가 있어 입원이 가능했다. 입원실 침대에 눕자마자 참아왔던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아파서가 아니었다. 상태를 체크하고 항바이러스제와 영양 수액을 꽂아주는 간호사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아이고... 그동안 얼마나 아팠을까."


치료 과정에서 고통은 오롯이 혼자 감내하고 견뎌내야 하는 '시지프스의 돌'이었다. 의사, 약사, 가족들, 친구들을 포함한 그 어떤 타인도 내가 얼마나 아프고 괴로운지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언어로 표현한들 내가 느끼는 고통의 생생함은 오직 나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이해받고 싶었고 동시에 존중받고 싶었다. 적어도 나의 아픔이 “나도 겪어봐서 알아” 혹은 “그 정도면 별 거 아니에요”라는 말로 납작하게 눌리는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았다. 고통만큼 실존과 깊이 연결된 감정이 또 있을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은 그 사람의 아픔을 헤아린다는 말과 같은 의미일지 모른다. 




2집 앨범 수록곡 <Groin>을 들으며(이 노래는 “세상엔 재수 없는 새끼가 많아”로 시작한다) 그간 남준에게 일어난 일들을 돌아봤다. 당분간 그룹 활동을 쉬어간다는 이야기가 'BTS 해체설'로 둔갑하고, 사적으로 방문한 사찰에서 스님과 나눈 차담 내용이 기사로 공개됐다. 코레일 직원이 호기심을 핑계로 그의 개인 정보를 열람했으며, 입대를 안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끊임없이 군 문제로 수군거렸다. 남준은 "솔직하고 싶은 용기는 역시 언제나 불필요한 오해와 화를 부르는 것 같다"며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외적으로나 팬들에게나 평정심을 잃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에 10년이 넘도록 그가 (과도하게) 감당해야 했던 '고통의 무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팬인 나조차도 인기에 비례해 견뎌야만 하는 유명세로 여길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 남준은 지금까지 잘 버텼으니까. 늘 우아하고 멋지게 대처해 왔으니까. 하지만 종이에 살갗이 조금만 베여도 피가 나고 아픈데, 오래 견뎠다고 해서 고통의 칼날에 무뎌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특히 나는 우리 팀에서 바른말하고 좋은 말 하고 앞에 나서서 팀을 대표하고 이런 거잖아.
사람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게 막 스피치, 연설, 영어, 소신 발언 이런 거잖아.
근데 사실 난, 되게 그냥 하찮은 스물아홉 살 한국 남자잖아.
보통까진 아니더라도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사는 그냥 스물아홉 살.
모든 사람들의 눈치를 다 보다가는... 이러다가는 그냥 내가 진짜 죽고 싶을 거 같더라고."

* <Right Place Wrong Person> 앨범 프로모션 콘텐츠에서 멤버 지민과 나눈 대화


조금씩 <Right Place Wrong Person>  앨범에 마음이 열려 가는 와중에 남준이 앨범 제작 과정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찍어 놓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이 영화가 다사다난했던 그의 지난 1년을 구성하는 결정적인 퍼즐 조각이 될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팬들은 화면 속 남준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의 일부를 보게 되었다.


영화의 중간쯤이었나. 남준은 개인 작업실에서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닌 표정으로 털어놓는다. "요즘 XX 일희일비, 부화뇌동, 표리부동의 아이콘이야." "남 눈치를 너무 봐. 다른 사람의 비언어적인 정보에 너무 민감해." 이어서 자신은 평온한 성정이 되지 못한다고. 방탄소년단의 리더라는 자리가, 책임감이 지금껏 그렇게 끌고 왔을 뿐이라고. 삶은 균형 잡기 외줄 타기와 비슷해서 어떤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는 사람들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며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스크린 속 남준은 닮고 싶은 사람도 존경하고 싶은 사람도 아니었다. 내 멋대로 투사한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나와 같은 땅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 속 존재였다. 아직 표현하지 못한 감정이 많아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한 모습이 많아서, 자신을 어디까지 내보여야 할지 고민하느라 가끔은 스스로가 위선적이고 정직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래서 창작을 통해 어떻게든 솔직해지려 하는 나 혹은 우리와 닮은 그냥 사람이었다.


RM의 다큐멘터리 영화 <Right People, Wrong Place> 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 출처: 빅히트 뮤직


슈퍼스타의 페르소나를 걷어내고 굳이, 애써, 숱한 오해와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솔직한 자신을 보여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남준에겐 그것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방탄소년단 RM이 아니라 인간 김남준으로 다가가고 싶은 마음, 약한 모습도 기꺼이 드러내 소통하고 싶은 마음, 10년 전 트위터에 "가끔은 랩몬스터(RM으로 바뀌기 전 예명)가 아닌 김남준으로서 너의 얘기를 듣고 싶다"던 마음은 "사랑해, 진심이야."라는 글자에 다 담기지 못하는 사랑과 진심을 담아낸다.



“자신의 기질을 사회적 모습 속에 잘 통합시켜 낼 수 있는 개인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실존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우리는 그런 이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끌리지만,
사실은 그들이 용감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끌리는 것이다."
- 마리 루티, <가치 있는 삶> 중에서



아이돌과 팬, 처음부터 환상을 깔고 시작하는 관계에서 진실성을 추구하는 건  남준이 꿈꾸는 이상을 향한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용기를 내 온마음으로 부딪혀 오는 사람에게 나도 똑같은 무게의 진심과 사랑을 전하고 싶다. 음악을 매개로 그가 토해내는 감정이 끝끝내 오해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해도, 오해를 이해로 바꾸려는 노력을 그만두고 싶지 않다.


진심은 글자만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너와 나 사이 보이지 않는 거리를 좁힐 수 있는 건 언어가 아닌 행동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표현하고 너를 이해하기를 게을리할 수 없다. 이것이 육체로 분리되어 있는 우리가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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