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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계꽃 Dec 15. 2024

악착같이 할 수 있는 행복

세 번째 키워드, 열정

사랑은 사람을 어디까지 미치게 할 수 있을까? 2001년 3월, 14살 소녀는 문방구에서 하늘색 A4용지를 사다가 웹사이트에서 내려받은 글을 프린터로 한 장씩 인쇄했다. 다음날 새벽, 소녀는 스카치테이프를 주섬주섬 챙겨 동네 상가 벽에 하늘색 A4 용지를 정성스레 붙였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작업을 마치고 학교에 갔을 것이다. 소녀의 동생은 집에 와 이렇게 말했다.


"언니, 손호영 생일 축하 쓰여 있는 하늘색 벽보 있잖아. 그거 언니가 붙인 거야?"


끓어오르는 열정을 차분하고 우아하게 통제할 힘이 14살 소녀의 전두엽에 있을 리 없다. 소녀의 열정은 지독한 짝사랑으로도 구현되었지만, 공개방송 무대를 보기 위해 첫차를 타고 잠실 롯데월드로 가 하루종일 쫄쫄 굶으며 대기하고, 무작정 방송국으로 찾아가 경비 아저씨와 추격전 끝에 리허설 현장을 눈에 담는 식으로도 나타났다. 32살 쭌이형의 연애를 이유로 팀이 와해될 뻔했으나 소녀들은 “5-1=0”이라는 문구를 버스, 신문 등에 대대적으로 광고해 소속사의 부당한 처사를 알리기도 했다. (2024년에도 덕후들은 그 누구보다 사회 부조리에 적극적으로 맞서고 있다.) 마침내 위기를 극복하고 발매하는 앨범을 구매하려 학원에서 뛰쳐나와 근처 레코드 가게로 달려간 날, 학교에서 다른 반 아이들이 신곡을 듣기 위해 CD 플레이어를 빌려달라 했던 날도 있었다. 누군가에겐 이해하지 못할 광기처럼 보이겠으나 덕후는 내심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이렇게 미친 듯이 사랑한 경험은 그 자체로 매우 특별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소녀는 성인이 되고 나서 깨달았다.


질풍노도의 사전적 의미는 몹시 빠르게 부는 바람과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물결이다. 사춘기 청소년이 내뿜는 듯한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열정은 이제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 2023년 1월 14일을 시작으로 내 안의 광기가 죽지 않았음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캐릭터가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던 IMAX 관람


4n회 차 영화 관람, 원작 만화 한국어판 전권 구매 후 3회 완독, TV 애니메이션 정주행, 일러스트집 1, 2권 모두 구매, 일본어 완전판 구매(산왕전), 공식 팸플릿 구매, 포토티켓 약 60개 출력, 응원 상영 및 비공식 이벤트 카페 참석, 덕메(덕질 메이트)와 오프라인 만남, 일본인 덕메들과의 랜선 덕톡회(같은 대상을 좋아하는 덕후끼리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 블루레이 한국어판, 일본어판 구매, 정대만 사케 직구 등등등등... 2023년은 슬램덩크의, 슬램덩크를 위한, 슬램덩크에 의한 시간이었다.


용산 CGV에서 3회 차 관람을 마친 날, 이곳이 괜히 덕후의 성지가 아님을 몸소 체험한 후 오로지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기 위해 주 1회 왕복 2시간을 달려 용산 아이파크몰로 향했다. 선수들의 숨소리, 농구화와 코트 바닥이 부딪혀 내는 마찰음, 누가 공을 잡느냐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드리블 소리, 코트 위에 날리는 먼지, 관중석에 숨어 있는 원작 캐릭터들, 선수들의 땀방울, 송태섭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터지는 10-FEET의 <제제로감>까지! 열 번을 봤든 스무 번을 봤든 그 어느 것도 놓칠 수 없었다. 한 주의 시작과 마무리를 영화관에서 하고 수시로 트위터(현 X)에 접속하며 농놀의 축복에 흠뻑 빠졌다. 처음에는 나도 어리둥절했다. 2D 캐릭터에 이렇게까지 진심일 수 있단 말인가. 이 영화의, 이 만화의 무엇이 사람을 이토록 활활 타오르게 만드는 걸까.

 

주변 사람들에게 슬램덩크로 4시간은 거뜬히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하곤 하는데,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다 (진지)


2023년은 도전의 해이기도 했다. 완전히 새로운 나, 진짜 욕망에 충실한 나로 살겠다고 야심 차게 선언했지만 사실 마음 한켠에는 늘 불안이 말을 걸어왔다. 야, 심리상담 돈도 못 버는데 그걸 한다고? (돈을 목적으로 선택한 거 아니야) 그래, 대학원을 간다고 쳐. 학비는 어쩔 건데? (학자금 대출이라는 제도가 있어. 선배 선생님들도 대부분 그렇게 공부하셨고) 아니 근데 솔직히 너, 직업 바꾸는 게 하루 이틀이야? 그렇게 기를 쓰고 번역한다고 했으면서 이제 와 심리학을 하겠다고? 공부랑 실제로 상담을 하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인데, 이번에는 진짜 확신이 있는 거 맞아? 이러다 마흔에 갑자기 또 바꾸겠다고 하는 거 아니냐고!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망설여졌다. 자기만족을 넘어 직업으로 끌고 갈 능력과 적성이 있는지, 해보지 않고는 스스로를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재학 중이던 사이버대학 학생상담센터에서 수련할 기회를 얻었을 때 불안은 최고점을 찍었다. 헤매고 고꾸라지고 실수를 연발하는 초보상담사의 당연한 모습을 직면할 수 있을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그런 내게 슬램덩크와의 만남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만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농구 하나만을 이야기한다. 표면상 "전국제패"가 목표이지만 그걸 이루지 못해도 누구 하나 좌절하지 않는다. 그들은 농구 자체가 즐겁다. 주장인 채치수가 앵무새처럼 "전국제패"를 외치지만 그의 목적이 진정 '승리'였다면 북산이라는 약팀에서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체력을 키우기 위해 농구부에 들어왔으나 이제는 농구를 사랑하게 된 친구이자 부주장 권준호와 함께 채치수는 팀에 포인트가드 송태섭, 그리고 강백호와 서태웅이라는 전례 없는 두 천재가 합류할 때까지 북산에 남아 버텼다. 농구를 순수하게 즐길 수 있었기에 팀이 최상의 전력을 갖출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슬램덩크의 참멋은 등장인물이 실패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영화에서 송태섭은 아버지와 형을 잃은 슬픔, 형과 겹쳐 보이던 선배(정대만)의 방황, 뜻대로 풀리지 않는 농구부 생활 등 그를 지탱하던 지지대가 무너지는 실존적 위기가 닥쳤을 때 동굴에서 한바탕 울부짖은 후 다시 드리블 연습을 시작한다. 한편 전국 최고의 팀 산왕공고의 에이스 플레이어 정우성은 북산과의 경기 전, 신사로 가서 고교 농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며 자신에게 필요한 경험을 달라고 빈다. 그리고 그는 북산에게 1점 차로 패한 후 복도에서 서럽게 흐느낀다. 팬들 사이에서 정우성은 농구신의 가호를 받는 캐릭터로 불리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때의 패배가 없었다면 그는 미국 팀에서 포인트가드라는 새로운 포지션에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포인트가드는 패싱이 중요하다. 이는 영화에서 서태웅이 각성한 계기인 동시에 서태웅이 정우성을 이긴 이유이기도 하다). 동서남북 그 어디에도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땐 그냥 묵묵하게 하던 일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음을, 실패라는 경험이 데려다줄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있음을 송태섭과 정우성의 눈물이 가르쳐줬다.






성질머리가 급한 나는 지금이 묵묵하게 견뎌야 하는 시기란 걸 알면서도 앞서 이 터널을 지나간 사람들의 '영광'만 바라보며 신세한탄을 하곤 한다. 따지고 보면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도 과거의 내가 묵묵히 견딘 시간들에 기반하고 있는데 말이다. 첫 내담자를 만나기 전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거울을 보며 송태섭의 대사를 읊조렸다. "힘들어도 심장이 쿵쾅거려도 있는 힘껏 강한 척한다." 그걸로도 진정이 안 되면 천둥벌거숭이마냥 '천재'라 외치던 강백호를 떠올렸다. "맞아, 나 초짠데 어쩌라고. 그냥 해. 일단 해." 자꾸만 미래로 달아나는 생각을 현재로 붙잡아 놓기 위해 작가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인터뷰를 읽고 또 읽었다. "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나 지금이야." 슬램덩크 정신으로 2023년이 걸어오는 도전을 받아냈고, 그 결과 원하던 대학원에 진학하고 심리 관련 콘텐츠를 만드는 직무로 새롭게 취업도 했다. 게다가 2023년을 지나오며 한 번도 가진 적 없던 새로운 욕심까지 생겼다. 바로 동료다. 뼛속까지 개인주의자인 내가 동료를 꿈꾸다니, 이건 세계가 흔들릴 정도의 변화다.


순수 열정에서 비롯되는 몰입의 즐거움. 내면의 불안이 물어왔던 질문, 이번에는 확신이 있는 게 맞냐며 다그쳤던 목소리에 대한 대답을 슬램덩크를 통해 찾았다. 나는 심리학이 재미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심리학이라는 도구로 사람의 마음을 탐구하고 거기서 얻은 지식이 누군가에게 삶의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짜릿하다. 동시에 한 사람과 진지한 주제로 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 행복을 느낀다. 좋아서 하는 공부, 의무가 아닌 공부의 재미를 36년 만에 알았다. 아니, 알고 있었는데 자기기만과 회피로 잊었다가 되찾았다고 말해야 정확하겠다. 솔직함이 주는 최고의 선물은 가벼움이다. 직면에 직면을 거듭할수록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타인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 시작한 번역이 그랬고, 취약성을 감추고자 시작했던 관계가 그랬다. 끝까지 옆에 남은 건 심리학과 글쓰기다.



작가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씨네 21> 인터뷰에서 발췌



악착같이 할 수 있는 행복(ガムシャラになれる幸せ). 2018년 일본에서 슬램덩크 신장재편판 출간 기념으로 내건 캐치 프레이즈라고 한다. 슬램덩크를 꿰뚫는 수많은 단어와 문장이 있지만 본질은 하나다. “악착같이”가 “행복”을 수식하는 이질감과 균열감. 이 파열 효과가 증폭시키는 두 단어 사이 거리만큼이나 깊고 커다란 열정이란 에너지. 아, 무언가를 악착같이 하고 또 (함께) 해낼 수 있는 행복이라니! 악바리, 독하다, 뭘 위해 그렇게 힘들게 사냐 등의 말들이 다르게 들린다. 역시나 무엇이든 어딘가에 미쳐 있는 (미칠 줄 아는) 사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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