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육아 없는 육아휴직

by 주원

얼마 전 남편이 육아휴직을 쓰겠노라고 했다. 막내가 초등학교 3학년인데 육아휴직이라니 황당해서 말도 안 나왔다. 며칠이 지나자 기간은 대략 한 두 달 정도 생각한다고 했다. 설마 진짜겠어? 또 한 주가 지나자 오는 6월 중순쯤이라며 구체적으로 날짜를 명시하기 시작했다.


진심인 모양이었다.


육아할 애가 없는데 무슨 육아휴직이란 말인가. 설마 이 인간이 밖에서?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애는 우리 집에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남편이 육아에 헌신하는 사람도 아니다. 쌍둥이 신생아 전투육아 시절, 친정엄마와 같이 셋이 삼교대로 수유했던 때를 제외하면 남편의 육아기여도는 10프로도 되지 않는다. '아빠 왔다.'하고 퇴근 인사를 하고 잠들면 이불을 덮어주는 게 다다. 아! 매주 일요일 아이들 손발톱은 깎아준다. 뒤에서 포근히 안아주며 손발톱을 깎아주는 것이 너무 좋아 보여 그것만은 꼭 남편이 하게 했다. 주말에 함께 보낸 시간을 생각하면 20프로 정도는 쳐줘도 될 것 같다.


혼자 애면글면 허리 한 번 못 피고 애셋 키울 때 남편이 육아휴직을 해줬으면 하고 바랐던 적은 있다. 하지만 막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안정된 직장에 자리를 잡은 남편은 육아휴직 같은 말은 입밖에도 못 낼 만큼 바빴다. 매일 새벽에 나가 아이들이 모두 잠든 밤에 들어왔다. 집에서 밥 한 끼를 못 먹고사는 퍽퍽한 삶이었다. 주말부부로 지냈던 적도 있다.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바쁘고 힘들게 살았다. 몸이 힘든 것은 그나마 견딜만했는데 아빠의 빈자리가 느껴질 때는 속이 상했다. 어린이집 발표회, 유치원 졸업식, 초등학교 입학식, 여러 참관수업 등이 모두 내 독차지였다. 어린이집, 유치원 행사는 어떻게 잘 버텼는데 초등학교는 만만치 않았다. 왜 하필 참관 수업이 하필 셋다 같은 날 같은 시간대인지. 기다리는 아이들 실망할까 봐 5층짜리 건물을 뛰어서 오르내리며 계단에 욕도 해봤다. 남편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로 바빴다. 사실 남편 탓이 아닌 줄 알지만 조금 원망도 했다.


이제야 조금 숨 돌리고 사나 했는데 육아휴직이라고?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자고로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남편은 회사에 가야 세계 평화가 유지되는 법이다. 학교 급식을 먹고 오면 애들은 더 이뻐지고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와야 남편도 듬직해진다. 점심 한 끼의 자유는 주부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다. 혼자 몰래 먹는 라면은 신의 음식 암브로시아이며 커피는 넥타르란 말이다.


가끔 아이들이 아파서 등교를 못 하거나 남편이 휴가를 내면 소중한 나의 일상에 금이 간다. 나는 소소한 일과를 열심히 하고 모든 일과를 완벽히 마무리 한 날 특별히 잘잔다. 주부로서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수년간 공을 들여 농축한 나만의 루틴이었다.

(집사가 일찍 퇴근하면 화를 낸다는 고양이의 마음을 알 것 같다.)


평일에 집 밖으로 안 나가는 아이들과 남편은 눈에 거슬린다. 때맞춰 밥을 먹여야 한다. 냉장고를 수시로 열어 간식을 꺼내먹고는 치우지도 않는다. 수시로 물건이 어디에 놓여있는지를 묻는다. 약속이라도 있어 집에 식구를 두고 밖에 나가면 여러 번 전화가 온다. 집을 깨끗이 치우고 나가도 들어오면 혼돈 그 자체다.


애들과 남편이 집에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애끓는 사랑과는 별개다.

마음을 가다듬어 보았다. 무슨 일이 있던 걸까? 회사를 전쟁터라 여기고 비장하게 출근하던 사람이었다. 가장의 무게를 외면할 사람이 아니다. 소처럼 일만 하던 사람이 휴직을 하겠다고 한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회사에서 힘든 점이나 불만을 가끔 이야기했지만 대단한 사건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그러고 보니 최근 남편의 얼굴이 달라졌다. 퇴근하고 현관문을 들고 들어올 때 얼굴이 밝다. 맥주 한 잔 마시지 않고도 잘잔다. 휴직을 생각하면서 남편이 웃기 시작했다. 어깨의 짐을 한 꺼풀 벗은 듯한 그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왕복 3~시간의 출퇴근을, 고된 업무를, 인관관계의 스트레스를 한 달에 한 번 찍히는 월급명세서로 모두 씻어낼 수는 없는 거다. 매일 조금씩 내 남편의 수명이 깎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능한 오래 이 사람과 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왼쪽 가슴 피부 아래서 꿈틀거렸다.


"여보. 당신 휴직하면 매일 나랑 탁구 치자."

"왜?"

"탁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계절 내내 칠 수 있어. 조심히 치면 평생 할 수 있는 운동이야."

"그래. 뭐든 운동할게."


6월이 다가온다. 키울 애가 없으면 어떤가. 남편은 스스로를 키우면 되고 나는 남편을 돌보면 된다.


person-598191_1280.jpg 사진출처: 모두 픽사베이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10화복리의 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