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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야 미안해

by 주원

"여보 당신은 좋아하는 채소가 뭐야?"하고 물으니

"채소? 채소를 누가 좋아해?"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밥상을 차리다 보면 채소가 설 자리가 없다. 아이들도 아버지의 훌륭한 본보기를 따라 나물류는 거의 손을 안 대고 샐러드는 그나마 조금 먹는다. 성장기 아이들이라 단백질 위주의 식단을 짜지만 고기라고 매일 먹기는 어렵다. 면류나 빵류로 채워지기 십상이다. 조금만 방심하면 탄수화물과 고칼로리 음식이 식탁을 점령한다. 나는야 우리 집 건강 수호신. 싱싱한 채소를 먹이고 싶은 나와 먹고 싶지 않은 식구들과 심심치 않게 대치 상황이 벌어진다.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온 식구 젓가락 노선도를 그릴 수 있다. 남편은 고기 국 고기 국 밥 고기 김치. 둥이는 밥 고기 국 김치 밥 고기 국 김치. 막내는 고기 고기 고기 밥 밥 밥.(랩 하냐?) 애들은 그렇다 쳐도 남편까지 채소를 안 먹는 모습이 얄미워 가끔 나물을 움푹 덜어 남편 입에 넣어준다. 애들 앞이면 싫은 티 못 내고 받아먹는다. 그 마저도 생 당근이나 가지 요리는 절대 안 먹는 채소라 빼준다.


둥이는 그래도 좀 먹는 편이었는데 사춘기가 되자 채소를 영 못 먹을 음식 취급했다. 알록달록 예쁘게 플레이팅을 해도 요리조리 굴려낸 다음 먹고 싶은 것만 먹는다. 막내는 유아식 때부터 채소를 싫어했다. 채소를 먹여주려 하면 입을 꾹 닫기에 몇 번 진짜 맛있는 거라고 허풍을 좀 떨었더니 역효과가 났다. 풀 맛 나는 음식을 맛있다고 한 엄마의 입맛 자체를 불신해 버렸다. 의심스러운 음식을 먹이려 하면 윗니와 아랫니 사이를 머리카락 사이만큼만 벌리고 그 안에 들어오는 것만 허용했다.


별수 없이 작전을 잘 짜야한다. 채소를 덜 먹었다 싶은 주에 소고기야채찜이나 샤부샤부, 밀푀유 나베처럼 온갖 야채를 듬뿍 넣어 익힌 요리를 한다. 정체성을 잃고 흐물거리는 채소들을 소스에 찍어 먹으면 채소 맛이 안 난다고 했다. 폰즈 소스의 위력이란! 아니면 찜닭, 닭볶음탕이나 카레처럼 감자나 양파가 꼭 들어가야 맛있는 음식을 만든다. 이때도 당근은 개밥에 도토리다. 당근을 먹이고 싶을 때는 볶음밥이다. 이유식을 만들 때만 해도 칼질이 하세월이었는데 이제는 다지기 달인이 되었다. 아무리 노련하게 젓가락질을 하는 아이라 해도 볶음밥에 있는 당근을 쉬이 골라내지는 못한다.


이도저도 안될 때는 돼지고기를 구워서 쌈채소와 함께 차린다. 여린 상추에 잘 익은 고기를 얹고 돼지기름에 노릇하게 구워진 마늘을 쌈장에 콕 찍어 얹어준다. 매콤 짭짤 파절이는 또 어떻고! 한국인이라면 어떤 채소든 쌈채소로 활용할 수 있고 어떤 채소든 고기 위에 얹어 먹을 수 있다.


엊그제는 오랜만에 시판 소스를 사다 파스타를 해 먹기로 했다. 즐겁게 마트에 갔는데 막상 소스를 사려고 하자 셋이 서로 자기가 고른 소스를 사자며 옥신각신 싸우기 시작했다. 운동을 하고 난 뒤라 그 싸움을 기다려주기에는 너무 배가 고팠다. 세 가지 맛 소스를 다 사되 가위바위보로 이긴 사람이 오늘의 파스타를 고르기로 했다. 첫째는 토마토소스, 둘째는 봉골레, 셋째는 크림소스를 골랐다.


집에 와서 소스를 정하려고 하니 아이들 눈빛이 달라졌다. 결전을 앞두고 눈알이 신중하게 굴러갔다. 가위바위보! 하는 순간 엄청난 긴장감이 내게까지 느껴졌다. 부디 막내가 이기기를! 막내는 먹을 것에 진심이라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면 진상이 된다.


아뿔싸! 첫째가 이겨서 토마토소스 파스타가 당첨되었다. 결과를 확인하는 동시에 막내는 거실에 뒤집어졌다. 작은 사람 하나의 좌절감과 분노가 거실을 꽉 채웠다. 발버둥을 치는 것은 눈물 콧물을 짤 시동을 거는 거였다. 십 년을 겪으니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고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의외로 막내가 금방 눈물을 그쳤다. 이제는 혼자 버둥거리기 민망한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안 것일까? 막 파스타 면을 삶는데 슬금슬금 막내가 다가왔다.


"엄마 짜증내서 죄송해요. 그런데 면만 삶으면 소스는 각자 부어서 섞어 먹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그럼 엄마 저 크림 파스타 먹고 싶어요. 엄마가 삶은 면 주시면 제 파스타는 제가 준비할게요."


얘는 천잰가? 맞다. 사실 그러면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때 첫째가 이의를 제기했다.


"엄마. 그러면 가위바위보 해서 이긴 의미가 없잖아요."


얘도 천재다.


"언니 말이 맞아. 애초에 가위바위보로 정하기로 했으니까 사실은 토마토소스를 먹는 게 맞아. 하지만 00 이가 감정을 잘 추스르고 해결책을 냈으니 칭찬하는 의미로 허락해 줄게. 다음부터는 졌다고 네 마음대로 메뉴를 바꾸는 것은 안돼."

"네. 엄마 죄송해요."


올리브유에 마늘을 달달 볶다가 양파도 넣었다. 양파가 반투명해지는 때에 맞춰 닭가슴살 햄도 숭덩숭덩 썰어 넣었다. 휘리릭 볶아준 뒤 토마토소스 한 병을 다 부어 골고루 섞었다. 한눈에 봐도 먹음직스러운 소스가 완성되었다. 아 맞다 단백질! 냉동고에서 직접 만든 떡갈비를 꺼냈다. 달지 않게 만든 거라 미트볼처럼 파스타 소스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떡갈비를 얹은 토마토 파스타와 크림소스 파스타. 우리는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맛있는데 왜 거절했는지 궁금해져서 기분이 좋아진 막내에게 물었다.


"00아. 그런데 토마토 파스타는 왜 싫다고 했어?"

"토마토가 채소잖아요."

"채소가 왜 싫은데?"


입에 있던 파스타를 꿀꺽 삼키더니 말했다.


"엄마. 채소는 땅에서 자라잖아요. 땅에는 흙이 있죠? 흙 묻으면 옷이 더러워지죠? 흙이 더러워서 그래요. 그러니 흙 묻었던 채소를 제가 어떻게 먹겠어요?"

"......"


천재라고 했던 거 취소. 채소야 미안해.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vegetables-1238252_1280.jpg 사진 출처: 모두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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