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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아가씨의 큰 그림

by 주원

딸들에게 사촌 언니가 하나 있다. 양가를 통틀어 딱 하나뿐인 사촌 언니라 아이들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다. 12년 전, 시조카딸의 돌잔치가 끝나고 나는 쌍둥이를 낳으러 갔었다. 딱 365일 차이 나는, 생일이 같은 언니. 그것 만으로도 아이들은 특별한 유대감을 가졌다.


우리 아이들이 유난히 예민하고 낯을 가리지만 조카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그 아이가 나를 시원하게 '외숙모'라고 부르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내게 말을 걸기는커녕 묻는 말에만 겨우 눈도 안 마주치고 답할 정도다. 그렇게 낯을 가리면서도 시조카 아이는 우리 집에 잘 온다. 명절에 제일 신나는 이유는 아마 서로를 만나기 때문일 거다. 가까운 곳에 살지만 생활패턴이 달라 방학이나 명절, 어머님 생신 같은 굵직한 가족 행사 때가 아니면 자주 만나지 못해 늘 아쉬워한다.


지난 3월 어머님 생신 때 만나 회포를 풀었던 아이들은 다음 만남이 어버이날 즈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4월부터 관리가 시작되었다. 틈만 나면 언니가 언제 오는지, 언니랑 몇 시간을 만나 놀 수 있는지, 언니가 자고 가면 안 되는지를 물어댔다. 몸이 달아 어쩔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하늘이 두쪽 나도 만나게 해 줄 테니 걱정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최대한 많이 놀게 해 줄 테니 대신 더는 묻지 말아라 경고도 했다.


5월이 되자 엄마의 경고는 어느새 잊고 다시 언니 소식을 물었다. 토요일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는 소식을 알리자 아이들은 오매불망 토요일만 기다렸다. 그런데 하필 그날 일이 생겨 하루 뒤로 미루게 되었다. 아이들의 실망이 말도 못 했다. 그 작고 소중한 기다림이 애틋해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대신 언니를 일찍 초대하자고 했다. 단 한두 시간이라도 더 놀 수 있다고 생각하자 아이들은 수긍했다.


아침부터 들떴다. 언니가 오면 무얼 하고 놀지 궁리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듯했다. 몇 시쯤 도착할 수 있는지 다시 확인했다. 일찍 올 수 있는지 물어보라는 성화에 남편이 형님에게 전화를 했다. 얼른 우리 집에 데려다 달라고 조를 줄 알았던 조카는 의외로 덤덤했다. 중간고사를 너무 망쳐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스터디카페에 다녀와서 우리 집에 온다고 했다.


아이들은 실망했지만 공부한다는 언니에게 더는 조르지 못했다. 형님은 요즘 조카아이가 사춘기라 그런지 다 시큰둥하고 귀찮아한다고 했다. 일찍 데려다주냐고 물었는데도 아이가 괜찮다고 했다는 거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중학생이 된 조카아이는 초등학생 동생들과의 만남이 시시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아이들은 애써 서운한 마음을 추슬렀다. 약속시간 전에 언니를 데려다준다는 고모의 말을 한줄기 빛처럼 받든 아이들은 오히려 경건해 보였다.


결국 아이들은 저녁식사 때 겨우 만났다. 너무 기대했다 풀이 죽었는지 아이들은 저녁 먹는 내내 조용했다. 내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노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요 소망인 아이들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그러고 보니 3월에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어린애 같던 조카의 얼굴이 두 달 만에 많이 달라져있었다. 키도 크고 골반도 커진 것이 한눈에 보였다. 나이는 한 살 차였지만, 초등학생과 중학생은 엄연히 다른 모양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갈 때쯤 형님이 카페에 가서 차 한잔하고 헤어지자고 하는데 막내 눈에 불이 켜졌다. 그건 절대 안 된다는 거였다. 아쉬워서 그럴 테지. 이럴 때 내가 힘을 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형님 그러지 말고 저희 집 가세요. 오실 줄 알고 과일도 다 사다 놨어요. 애들이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번거로워서 안된다고 하던 형님도 그럼 그러자고 했다. 식구들이 다 같이 우리 집으로 향하는 길 아이들은 엄청 신이 났다. 1초도 아쉽다는 듯 떠들어댔고 나는 그런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러워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낮에 사다 두었던 과일과 빵을 먹고 어른들끼리 이야기 나누는 동안 아이들은 방에서 신나게 놀았다. 행복한 웃음소리가 닫힌 방문 틈으로 비어져 나올 정도였다. 한참 놀던 아이들이 뛰어나와 동시에 말했다.


"엄마. 언니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안 돼요?"

"당연히 되지. 얼른 고모한테 허락받아."

(안된다고 하는 쪽은 늘 고모다.)


"고모! 언니 자고 가도 돼요?"

"얘들아. 언니 준비도 안 하고 왔는데 어떻게 자고 가니?"


그러자 조용히 있던 조카아이가 말했다.


"제가 속옷이랑 칫솔은 챙겨 왔거든요. 잠옷만 외숙모가 빌려주세요."


예상 못했던 말에 어른들 모두 놀랐다. 훌쩍 커버린 조카는 다 생각이 있었던 거다. 초등 동생들이 한두 시간 더 놀 궁리를 하는 동안, 중학생 언니는 큰 그림을 그렸다. 중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받아본 점수에 놀란 조카는 이러다 못 놀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루 종일 노는 게 뭔 대수냐 나는 공부가 중요하다고 엄마에게 온몸으로 어필했을 조카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약속시간이 다가오자 비장하게 짐을 쌌을 조카의 표정은 과연 어땠을까?


girl-903401_1280.jpg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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