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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y May 08. 2020

채팅에 빠진 리까르도를 말리다 채팅의 늪에 빠졌다

늦은 새벽까지 채팅하는 이태리 친구에게 잔소리하다가 채팅의 맛을 느꼈다

리까르도 쎄르지오, 갑자기 그 친구가 생각났다.

마피아 영화에서 본 이탈리아인의 '뜨거움'을 가진 동료였다.

리까르도와 아자드 카슈미르의 무자파라바드에서 한 달 동안 한 팀으로 지내게 되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별장 같은 숙소 겸 일터에서 리까르도와 720시간 동안 함께 먹고 자고 일하게 된 것이다.

20년 전인 그 당시 거기에서 킬링타임을 할 수 있는 건 비디오테이프를 돌려서 옛날 영화를 보는 것이 전부였다.


난 팀장, 그는 팀원, 그리고 우리를 도와주는 운전사, 요리사 등 현지인 도우미 몇 명이 그 공간에서 살았다.

현지인 스태프들도 있었지만 주로 리까르도와 둘이 팀을 이뤄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팀워크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리까르도가 며칠 째 수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 매일 잠을 자야 할 시간에 깨어 있고 또 뭔가에 열중해 있었다.

하루, 이틀, 사흘,... 팀장으로서 그의 예사롭지 않은 행동이 우리 팀의 활동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까르도가 뭔가를 하는 시간에 알람을 맞춰놓았다. 새벽에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나서 조용히 거실로 나가보았다.


우리의 숙소이자 일터였던 UNFS Domel


리까르도가 랩탑 앞에 앉아서 때론 낄낄거리다가 때론 심각했다가 때론 조용히 워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했다. 리까르도가 돌아보았다. "리까르도! 이 새벽에 잠 안 자고 뭐하냐?"


리까르도가 말했다. "채팅하는 데! 왜?"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되묻는 그를 보고 약간 당황했다.

팀의 활동에 영향을 미칠까 봐 얘기한 건 데, 이게 사생활 침해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낮고 굵은 목소리로 다시 당당하게 말했다. "리까르도! 이렇게 늦게 까지 채팅하면 내일 업무에 지장이 있을 것 같은데!"

리까르도가 웃으면서 말했다. "팀장! 걱정하지 마! 내 할 일은 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까!"

그러더니 한 마디 더했다. "여기 하고 이태리 시차 때문에 이 시간에 채팅하는 거다. 이태리에 있는 여자 친구하고 장거리 연애하는 거다. 불라 불라 불라."


나도 질세라 리까르도에게 더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너무 늦게까지 하진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라!"

그리고 내 방으로 향했다. 리까르도가 내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팀장도 채팅 한번 해봐! 그만둘 수 있는지!"



개구장이 같았던 리까르도 쎄르지오와 함께. 작가의 오른 손에 들린 '비망록'은 국가유물로 등재되서 용산의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며칠이 지났다.

리까르도가 채팅을 하는 횟수는 조금 줄어든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새벽에 채팅을 하곤 했다.

한편으론 총각이 장거리 연애를 한다는 데 너무 간섭하는 것도 인간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까르도에게 채팅하던 여자 친구의 안부를 물어봤다.

그랬더니 리까르도가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걔 말고 다른 애랑 채팅하고 있는데!"

"팀장이 채팅이 뭔지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한 번만 해보면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거야."라고 했다.


난 호기심이 많은 성격인지라 채팅이 뭐지 하는 궁금해졌다.

그날 저녁, 인터넷으로 채팅을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사이트를 찾았다. 무척 많았다.


그중에서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카페가 있었다. 30대의 연령층이 함께 하는 공간이라는 소개가 마음에 들었다.

가입했다. 그리고 눈팅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아톰님, 눈팅만 하지 말고 들어오세요!"

채팅 방에 가입하면서 내 별명을 아톰이라고 정했다. 당시에 하던 일이 세계 평화 유지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구를 지키는 아톰이 갑자기 생각나서 그렇게 정했다.  난 그때 유엔군 옵서버였다.


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사용하던 컴퓨터는 한글을 읽을 수는 있었지만, 한글 입력을 하려면 프로그램 변환 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래서 영어로 몇 문장을 쳤다. 답이 없었다. 한글 채팅방에 영어가 나타나서 상대방이 조금 당황했던 것 같았다.


다시 이렇게 쳤다. "I'm sorry. I can't write in Korean here in Muzzafarabad."

그렇게 나는 눈팅을 하면서 채팅의 맛을 조금씩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달 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팀원도 리까르도에서 스웨덴에서 온 다른 동료로 바뀌었다.

하지만 한번 시작한 나의 채팅은 계속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채팅 방에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여자 둘, 남자 하나.

여자 하나는 캐나다 교포라고 했고, 다른 여자 하나는 미국 교포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남자 하나도 미국 교포라고 했다.


그렇게 가끔씩 그들과 채팅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캐나다 교포 여자가 자긴 여행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있는 곳으로 여행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말했다. 남편과 함께 온다면 환영하지만, 혼자서는 오지 말라고!

그랬더니 그녀가 말했다. 남편은 사업하느라 바쁘기도 하지만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난 다시 말했다. 그래도 혼자 오면 안 된다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어린 아들과 함께 가면 되겠냐고! 아들과 자기가 함께 찍은 사진도 보냈다.

주기적으로 세계 곳곳으로 여행을 다니는데 카슈미르에서는 한 번도 여행한 경험이 없다고도 했다.


대여섯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카슈미르로, 채팅 방에서 만난 남자를 찾아 여행을 오겠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무리 오픈 마인드라고 해도, 당시 난 그녀를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지천명이 훌쩍 지난 지금은 여행을 정말 좋아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땐 내가 지금보다 훨씬 고지식했던 것 같다.

그녀는 한국계 캐나다인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행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녀와의 채팅은 그녀의 방문을 거부하면서 그렇게 끝났다.




또 한 명의 여자, 미국 교포라는 그녀는 거의 눈팅만 했다.

채팅 방에 왜 들어왔냐고 물었더니, 그녀가 말했다. 자기는 크리스천인데, 전도할 대상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나도 크리스천이라고. 그녀는 무척 반가워했다.

당시 난 현지 크리스천 빌리지에 사는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무슬림들이 주류를 이루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어서 크리스천 빌리지는 무척 열악한 주거 환경이었다. 아이들이 모여서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현지 목사님이 400달러 정도만 있어도 학교를 지을 수 있다고 했다. 함께 기도해 보자고 하고 돌아왔었다.


나도 반가웠다. 그녀에게 현지 크리스천 빌리지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녀가 말했다. 자기 남편이 후원할 곳을 찾고 있는 데, 남편과 상의해 보겠다고.


다음 날 그녀의 남편이라고 자신을 밝힌 M.W.라는 분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학교를 짓는 비용 400달러와 아이들 크리스마스 선물 비용 50달러를 보낼 테니 은행계좌를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현지인 목사님을 만나서 상의했다. 그리고 목사님 명의 은행계좌를  만들었다.

며칠 후 목사님으로부터 450달러가 들어왔고 공사를 착공하겠다는 소식을 들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그곳을 방문해서 아이들에게 공책과 연필을 선물로 주었다.

아이들은 처음 선물을 받는다고 했다. 특히, 학교에서 공부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그들에겐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때 후원했던 분이 본인을 밝히기 꺼려했고, 내가 후원한 것으로 해달라고 당부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내가 천사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학교를 지어 주기로 후원한 천사!

공사 착공 전 그 지역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게 돼서 학교가 어떻게 지어졌는지 보진 못했다.
학교 건물을 잘 지었는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지, 그곳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스웨덴 동료와 함께 크리스천 빌리지 주민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공책과 연필을 주었다. 내겐 아주 작은 것이지만 그들에게  귀중한 선물이었다.




미국 교포라는 남자분은 영어로 채팅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자긴 50대라고 하면서, 영어를 이렇게 잘하는 한국 사람을 만나서 채팅을 하게 되어 정말 반갑다고 했다.

별로 잘하진 않는데, 굿모닝 하면 영어 잘한다는 미국 사람처럼 얘기했다. 미국 시민권자라서 그런가?
당시 한국에서는 '유니텔'이라는 인터넷 회사가 있었다. 출국 전 유엔과 계약서를 주고받으면서 처음으로 유니텔에 가입했고, 이메일 계정도 처음 만들었다. 당연히 인터넷도 처음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엔에 1년간 근무하면서 인터넷 환경에 점차 익숙하게 되었다. 그런 시절이었으니, 50대 미국 교포가 채팅방에서 영어로 채팅을 주고받는 것이 기쁨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분과 실시간 영어 채팅을 하면서, 영자 타이핑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분과의 채팅은 내게 유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채팅하는 것에 흥미를 점차 잃었고, 동료들과 스쿼시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흐르는 강물처럼' 채팅 사이트와 영영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30대 시절, 2개월여에 걸친 나의 채팅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고 이렇게 끝을 맺게 되었다.

채팅 방에서 만났던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 한 여자는 너무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서 날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런데 다른 한 여자와 남자는 내게 유익이 되었다.

한 여자를 통해서 현지인 마을에 학교를 세우게 되었고, 한 남자를 통해서 영타 실력이 엄청나게 향상되었다.


채팅에 빠진 리까르도를 말리다가 한동안 채팅의 늪에 빠졌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내 인생의 색다른 경험이기도 했다.

귀국 후에 알게 되었지만 당시 한국에서 '주부 인터넷 채팅'으로 가정 파탄난 집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고산지대의 열악한 근무 여건과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 질환으로 한국인 동료 한 명이 세상을 먼저 떠났다.
Rest in peace!
어쩌면 그때의 그 채팅이 리까르도와 나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디오 보는 일 외엔 할 것이 없던 곳에서 여가를 즐기는 방편이었다고나 할까?
유엔 옵서버로서의 작전활동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던 곳에서
외부인과의 접촉을 통한 정신적 자유로움을 맛보기 위함이었다고 할까?
아니면, 크리스천 마을에 학교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뜻 아래에서 내가 도구로 사용되었을 수도!


빨간 색 안쪽이 20년전 작가가 활동했던 카슈미르 지역이다. 검정색 점선이 인도측 잠무 카슈미르와 파키스탄측 아자드 카슈미르를 분할하는 Line of Contro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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