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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y Jun 12. 2020

6.25 전쟁과 미 해병대의 헬기 운용

시대를 선도하는 혁신은 夢想家와 의욕적인 헌신자들에 의해서 이뤄졌다

미국의 군대 중에서 해병대는 헬리콥터를 가장 늦게 도입하였다. 하지만 공지 전투(air-land battle)의 필수요소로써 회전익 항공기를 사용하기 위한 교리(doctrine)를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정립해서 시험하고 적용했다. 양차 대전이 종료된 이후, 제2차 세계대전시 미국이 사용했던 핵무기의 망령과 함께 해병대는 상륙작전 교리를 재고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핵 시대의 상륙작전을 위한 함안이동(ship to shore movement) 방법 중, 이전에 사용하던 상륙주정에 의한 이동은 성공적 상륙을 보장하기 위해 더 이상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여러 가지 옵션 중 전투 실험을 하게 된 유일한 대안은 함정에서 해안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헬기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즉, 대형 함정에서 해안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서 과거에는 중소형 상륙주정을 사용했다면, 그것을 헬기로 대체하는 방안이었다.


1946년 미 해병대사령관 알렉산더 A. 반데그리프트 장군은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기존 전술과 장비를 연구해서 해병대 구조 조정을 위한 권고(안)를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이 특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발된 사람은 태평양의 해병대 중에서 가장 혁신적이면서 전통주의자이자 몽상가였던 르무엘 C. 셰퍼드 Jr. 장군이었다. 셰퍼드 장군은 6.25 전쟁 시 한국에서 태평양 함대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상륙작전 시 상륙군 지원을 위한 헬기의 무한한 잠재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혁신적인 개념은 뿌리 깊은 저항에 부딪혔다. 대부분의 젊은 조종사들은 수동으로 조작하는 느린 헬기 보단 날렵한 전투기를 타고 적의 에이스와 공중에서 교전하길 원했다. 경험이 많은 조종사들은 자기들이 이미 조종법을 숙달했고 그 기능을 신뢰할 수 있는 기존의 항공기를 헬기로 대체하는 것을 꺼려했다. 다른 비판자들은 헬기가 너무 느리고 취약하다고 주장했다.


함안이동 수단으로 헬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대파를 설득했던 그들의 주장은 이와 같았다. 현재 해병대가 보유한 조종사의 수가 항공기 수보다 훨씬 많다. 따라서 헬기를 추가 운용할 수 있다. 개인의 바람은 항상 해병대 조직의 요구에 복종해왔다. 즉, 해병대 조직이 헬기를 요구하면 조종사들은 그에 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함안이동 간 헬기의 속도와 취약성에 대해서는 고정익 항공기가 아닌 상륙주정과 비교해야 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헬기는 함안이동 수단으로 고려하는 것이므로 현재의 함안이동 수단인 상륙주정과 비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헬기는 상륙주정보다는 훨씬 더 빠르고 민첩한 수단이다). 초기 헬기 옹호자들은 의욕이 넘치고 헌신적인 사람들이었다. '초더 소사이어티(chowder society)'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면서 막후 활동을 했던 그들은 혹독한 예산적 제약과 군종(services) 간 통합전투를 강조하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해병대의 혁신을 위한 자신들의 명성을 지켜냈다. 몽상가와 의욕적 헌신자들이 미 해병대의 혁신을 선도했던 것이다.


미 해병대의 전투력을 보강한 헬기는 6.25 전쟁 시 한반도 전구에서도 맹활약을 펼쳤다. 미 해병 헬기부대의 활약상을 전투현장에서 직접 목격하거나 경험했던 미 지상군 지휘관들은 상부에 "헬기, 헬기, 더 많은 헬기를 지원해 달라"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실제 전투 현장에서 미 해병대의 헬기는 수색, 전투 정찰, 공중 보급, 인원 이송, 의료 후송, 지휘 연락, 무선 중계, 긴급 유선 선로 가설, 추락한 조종사 구조, 전방 시찰, 포병 화력 및 함포 화력 유도 등의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한반도 전구에서 유엔군은 수많은 비상 상황에 직면했다. 급하게 작전 계획을 수립하거나 변경해야 했고, 구두 명령에 의존해야 했으며, 적에 대한 정보도 불완전했고, 유무선 통신도 잘 되지 않았으며, 각종 자료도 불충분했다. 이 모든 것을 헬기가 해결했다. 한국에 산재되어 있는 논과 밭은 헬기의 임시 착륙 장소로 사용되었고, 지휘관은 헬기를 이용해서 상급 부대에서 회의를 한 후에 예하부대로 바로 헬기로 이동해서 전투 현장을 직접 확인하면서 전방부대와 개별적 접촉을 유지할 수 있었다. 헬기를 이용해서 육안 관측, 통신, 지휘 통제가 가능했다. 정찰 후엔 공격을 위한 진격 경로를 재조정하거나 방어를 위해 유리한 지점을 식별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지평선 너머의 적을 관측해서 측방 경계를 할 수도 있었다.


아군의 사기를 고양하면서 전술적으로 가치가 있었던 헬기의 두 가지 임무는 공중 의료 후송과 구조 활동이었다. 헬기를 이용한 중상자 긴급 후송은 지상군들의 사기 앙양에 큰 효과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기회가 엄청나게 증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험준한 지형과 들것에 의한 후송으로 장시간 소요되던 것을 헬기로 신속하게 병원으로 이송함으로써 중상자의 생존성을 보장했다는 것이다. 중상자의 신속 후송과 전방 의료시설에서 헬기로 공수한 전혈의 즉각적 사용으로 한반도 전구에서의 미군 중상자 사망률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약 2% 수준에 불과했다.  또 추락한 조종사를 적진 깊숙한 곳으로부터 구조하는 해병대 헬기 운용으로 항공 승무원들의 사기도 고양되었다.


르무엘 셰퍼드 장군은 헬기의 강인함에 대해 회고했다. "헬기가 십여 개의 총알구멍을 갖고 복귀했다. 하지만 그 헬기는 중요한 부분에 총격을 받지 않는 한 계속 날아다닐 수 있었다. 무장이 없었던 헬기가 생존성을 향상할 수 있는 방법은 지형을 이용해서 최저공 비행으로 가능한 한 빠르게 들어갔다 나오는 식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크레이그 장군의 회고다. "헬기는 신의 선물이다. 한국의 산악 지형에서 올라가는 데 몇 시간씩 소요되는 감제고지에 정찰대와 외곽 경계부대를 신속하게 배치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수단이 바로 헬기였다. 더 많은 헬기를 배치해서 운용한다면 적의 조기 패배를 보증할 수 있을 것이다."


스미스 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헬기는 최소한의 이동 시간 내에 예하부대와 개별적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단장과 사단 참모들에게 계산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가치가 있었다. 사단 예하부대들이 한국의 산악 지형 장애물로 인해서 여러 곳으로 분산되었을 때, 헬기는 사단장에게 특별히 가치 있는 수단이었다."


크레이그 준장은 서울 탈환 작전 시 헬기를 이용하여 적절한 한강 도하 지점을 찾았고, 공중에서 주요 지형을 육안으로 정찰하면서 서울로 접근하는 도로망을 직접 확인했다.  


헬기는 미 해병대 지휘관들의 지휘 연락을 위해서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한국의 험준한 지형, 수많은 강과 하천, 전투부대의 광범위한 분산은 지휘관의 지휘통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헬기의 기동성은 지휘관들이 접근로를 정찰하고 주요 지형을 파악하고 후방에서 상급부대 회의에 참가한 후 신속하게 예하 지휘관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가능하게 했다.


헬기는 지휘관에게 유용했지만 추락한 조종사 구조나 중상자 후송 같은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지휘관들은 긴급 임무가 종료될 때까지 대기하거나 다른 이동 수단을 찾아야 했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루에데크 중위의 헬기가 크레이그 장군을 태우고 지휘 정찰을 하고 있었다. 이동 중 루에데크는 적의 대공사격으로 추락하는 미 해병대의 콜세어기를 발견했다. 콜세어기 조종사 콜 중위는 그의 콜세어기가 해상으로 추락하기 직전에 탈출해서 구명 장치를 부풀리고 있었다. 루에데크 중위의 헬기는 신속하게 콜세어기가 추락한 지점으로 이동했다. 루에데크가 해수면 위에서 하버링을 하기 위해 조종간을 잡고 있는 동안, 크레이그 장군은 물에 흠뻑 젖은 조종사 콜 중위를 헬기로 끌어올렸다. 헬기에 올라 탄 조종사 콜 중위는 안도의 숨을 내쉰 후 크레이그 장군의 등짝을 후려치면서 말했다. "고마워! 맥." 나중에 콜 중위는 크레이그의 장군 계급장을 본 후에야 그에게 거수경례를 하면서 예의를 표할 수 있었다. 크레이그 장군은 자신이 구해 준 조종사 콜 중위에게 말했다. "나의 영광이로군! 중위!"


제2차 세계대전 후, 미 해병대가 상륙작전 시 함안이동 수단을 보완하기 위해 도입한 헬기가 6.25 전쟁 당시 한반도 전구에서 활약한 스토리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지난 3월부터 [U.S. Marines in the Korean War]라는 책을 공동 번역하게 되면서 이런 역사적 사실을 접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호국보훈의 달이면서 6.25 전쟁 70주년을 맞이하는 6월에 이런 글을 쓰게 된 것도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해병대 헬기의 의료후송 중 첫 번째는 심각한 열사병 환자를 안전한 곳으로 이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헬기는 험준한 지형과 들것에 의한 장시간 지상후송을 신속한 공중후송으로 대체했다.


추락한 조종사 해상구조는 해병대 헬기의 중요한 임무였다. 유진 J. 포프 대위가 방금 구조돼서 옷이 젖어있는 조종사 알프레드 F. 맥 갈렙 대위와 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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