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새양말로 바꿔 신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직장 동료들과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실 때의 일이다. 한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Kenny! 오른쪽 발바닥에 구멍 났네? 요즘 삶이 고달픈 모양이지?”
오른발을 들어보니 양말 뒤꿈치에 커다란 구멍이 보였다. 난 그의 말에 개의치 않은 듯 대답했다. “그러게요! 요즘 유난히 오른쪽 뒤꿈치에 구멍이 잘 나네요!”
사실이다. 그 며칠 전에도 오른쪽 뒤꿈치에 구멍 난 양말을 신고 있었다. 하지만 양말 바닥에 구멍이 난 것에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언제든 새양말로 갈아 신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만큼 세파를 견뎌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구멍 난 양말이 창피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70~80년대 그 시절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렵게 살던 시절이다. 구멍 난 양말을 꿰매어 신고, 구멍이 너무 커져서 더 이상 기울 수 없을 때까지 신었던 기억이 난다. 그땐 친구가 양말에 구멍이 났다고 말하면 창피해서 귓불이 빨개지곤 했다. 더 이상 꿰맬 수 없을 때까지 신어야 하는 양말만 있었기 때문이다.
구멍 난 양말 얘기를 했더니 아내가 새양말을 잔뜩 사 왔다. 젊은이들이 즐겨 신는다는 발목 양말이다. 똑같은 모양에 색깔만 달랐다. 발목 위가 없어서 시원했다. 요즘엔 색을 바꿔가며 그 양말을 즐겨 신는다.
지난 금요일,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던 중, 슬리퍼를 벗어보니 양말 색깔이 달랐다. 한 짝은 흰색, 회색, 검은색이고 다른 한 짝은 흰색, 옅은 감청색, 짙은 감청색 양말을 신고 있었다. 무늬는 같고 색은 다른 삼색 양말을 신었던 것이다.
어!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왔네! 무심결에 내가 말했다. 한 동료가 웃으며 말했다. “Kenny 작가! 일부러 그렇게 신은 거 아냐? 작가답게, 언밸런스한 감각으로!”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젠 구멍 난 양말을 신거나 짝짝이 양말을 신더라도 창피하지 않구나! 그런 모습을 보고도 직장 동료 간에 서로 무안해하지 않고 웃어넘길 수 있구나! 그만큼 삶의 여유도 있고 마음도 풍요롭구나!
오늘은 한 친구가 첫 번째 출간했던 종이책의 어설픈 편집에 대한 구매자 평을 해 주었다. “Kenny! 브런치에서 읽을 땐 좋았는데, 종이책을 구매하고 보니 편집이 너무 허접하던데! 전문가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것 같더라.” 솔직하고 정확한 평이었다. 첫 번째는 그랬다. 출판을 위한 편집도 처음 해 보았고, 부크크 플랫폼의 기능도 잘 몰랐으며, 빨리 출간하겠다는 마음만 너무 앞섰다.
그런데 그 친구의 비평이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고맙게 들렸다. 아마도 이미 네 번째의 종이책을 출간하면서 그 친구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을 좇던 시절엔 다른 이들의 비평과 비난에 무척 민감했다. 쓴소리를 새겨듣기보단, 그로부터 나를 방어하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했다.
하지만 이젠 알고 있다. 외부로 드러나는 것보단 내면세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과 내용이 형식을 지배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어떤 것의 외형을 보고 그 내면을 판단한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