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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y Apr 07. 2020

너무 재지 않고 방망이를 휘두르다 보면

통섭적 인생이란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시도하며 사는 삶이다

피카소는 엄청난 다작 활동을 통해서 천재성을 발휘했다.

공이 날아올 때마다 너무 재지 않고 방망이를 휘두르다 보면 안타도 치고 만루 홈런도 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통섭적 인생이란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시도했던 피카소처럼 사는 것이다.

최재천 교수가 쓴 [통섭적 인생의 권유]에서 인용한 글이다.


청소년 시절 수년간 일기와 독서록을 쓰고, 신문과 잡지 스크랩을 한 적이 있었다.

성인이 되어 부모님 곁을 떠나기 전, 그 모든 것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어린 시절의 욕망과 치기와 나의 모든 것의 기록이었기에 언젠가 누군가 그것들을 읽게 된다면 벌거벗겨진 내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킬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기보다는 무엇인가로 잘 포장된 내 모습을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0대 중반에 들어선 지금 생각해보면 후회가 크다. 나 자신이 내 모습 그대로를 왜 사랑하지 못했을까?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시도했던 피카소처럼 어린 내가 했던 모든 것들이 지금 내 삶의 밑거름이었을 텐데.


요즈음 브런치 글쓰기에 재미를 붙였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에 한 번씩은 꼭 글을 써서 올리고 있다. 어떤 날을 두 번 쓰는 적도 있다.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바깥나들이가 줄어들면서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어젠 결혼해서 멀리 사는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아들이 말했다.

"아빠! 엄마가 그러시는데 아빠가 요즘 조금 이상해졌다고 하시네요?"

"저는 아빠가 최근에 쓰신 글을 보고 정치하는 친구가 생기셨나 했어요."

"엄마는 아빠가 퇴근하시면 성경은 안 읽으시고 태블릿만 보신다고 하세요. 장로님이 그러시면 어떡해요."

"어떤 글은 성경 얘기하다가 세상 얘기하다가 해서 두 부분으로 나누면 좋을 것 같아요."


아들과 아내의 말이 모두 틀린 말이 아니다.

요즘의 나는 국제정치와 국내 정치에 관한 글도 쓰고, 세상 사는 이야기도 쓰고, 좋은 책을 소개하면서 느낌도 쓰고, 신앙적인 에세이도 쓴다. 또 성경도 읽고, 브런치 글도 읽고, 뉴스도 보고, TED 강의도 듣고, 가스펠 송도 듣고, 7080 가요도 듣는다. 이건 나의 정체성(identity)과 연관되어 있다. 지금은 국제정치학자이고 교회 장로지만, 30여 년간 군인의 길을 걸었고, 어린 시절엔 책과 음악을 좋아했고 그림 그리기와 글짓기를 즐겨했다. 심지어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엔 의대 진학을 진지하게 꿈꾸기도 했었다. 이런 내가 어찌 한 군데 집중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요즘엔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할 때 구식 전자사전, 그리고 iPad와 iPhone을 번갈아 검색해 가면서 LG gram으로 문서를 작성한다. 여러 가지 자료가 동시 병행적으로 내게 도움을 주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봐도 정년퇴직 전의 직업군인이었던 시절과 지금의 내 모습을 비교해 보면 많이 이상해졌다. 이상해졌다기 보단 달라졌다. 좋게 말하면 진화한 것이다. 하지만 이어령 교수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도 안된다.


이어령 작가는 일곱 마리의 고양이(CAT)를 데리고 글을 쓴다고 한다.

CAT는 CAD(Computer Aided Design)에서 Design을 Thinking으로 바꾼 것이다.

글을 쓸 때, Computer Aided Thinking, 컴퓨터가 그의 생각을 도와준다고 한다.

즉, 그는 서재에서 여섯 대의 컴퓨터를 사용하고 잠자리에선 침대 곁에 둔 노트북으로 검색도 하고 메일도 보내고 메모도 한다. 또 책상 맞은편 안락의자 옆엔 아이패드, 갤럭시 노트, 킨들 같은 모바일 기기들이 꽂혀 있다.

이 모든 컴퓨터와 전자기기에 내장된 신구형 OS와 프로그램들이 그의 글쓰기를 돕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난 한 마리의 새끼 고양이(랩탑)와 더 어린 잔챙이들(아이폰과 패드, 전자사전)의 도움을 받아서 글을 쓰고 있다.


이어령 작가와 그의 일곱 마리 고양이(CAT) @https://news.joins.com/article/15798479

여하튼 지금의 나는 너무 재지 않고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다. 언젠가는 안타도 치고 만루 홈런도 치는 날이 오겠지! 설령 그런 날이 오지 않아도 좋다.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오는 모든 것을 시도했던 피카소처럼 나도 통섭적 인생을 살아보련다.

나의 귀여운 새끼 고양이와 잔챙이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오늘도 이렇게 한 편의 글을 쓴다.


나의 새끼 고양이와 잔챙이들, 잔챙이들 중 하나는 내 손에 들려 있다.

부록: 통섭이란 단어에 대한 이해

[통섭, 統攝, consilience]이란?

큰 줄기(통)를 잡다(섭), 즉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다’는 의미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통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범학문적 연구를 일컫는다. 『사회생물학 : 새로운 종합(Sociobiology : The New Synthesis)』(1975)을 저술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 1929~)이 사용한 ‘consilience’를 그의 제자인 이화여대 교수 최재천이 번역한 말이다. @https://m.terms.naver.com

Edward O. Wilson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이 출간되기 1년 전인 1997년 미국 California Reds Wine Club에서 만장일치로 결정되어 출하된 와인의 이름이 Consilience였다. 그들의 홈페이지에는 당시 사전에도 없던 그 단어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쓰여 있었다.

Consilience는 지식의 통일성을 뜻한다. Consilience는 옛날 어느 교수가 과학과 그 방법론에 관한 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그는 동료들이 과학을 이용하여 모든 것을 지극히 작은 단위로 쪼개는 데 여념이 없어 전체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을 걱정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른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통합되어 있으며,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들을 분리하면 그들만의 고유한 존재의 이유가 손상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이러한 관점을 잃지 말라고 했다. 그래야 모든 과학이 개념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무거운 주제이기는 하지만 와인에는 더할 수 없이 어울리는 말이다. 와인은 바로 우주와 인간의 통일을 의미하며 와인을 만드는 사람은 이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Consilience]라는 이름으로 출하된 와인, 그리고 Edward O. Wilson이 쓴 같은 제목의 책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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