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것과 흐르지 않는 것
2023년 노벨문학상 작가 욘 포세의 소설 [저 사람은 알레스]를 읽다. 길지 않은 분량이어서 순식간에 읽었으나, 읽는 내내 혼란스럽고 멍했다.
욘 포세는 노르웨이의 희곡 작가로 나로서는 노르웨이의 작가는 거의 처음 접했다고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노르웨이의 문학가는 [인형의 집]으로 알려져 있는 입센 외에는 욘 포세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202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평생도록 몰랐을 작가 아닐까 한다. 재미있는 건 입센도 욘 포세도 검색 사이트에 나와있는 얼굴의 표정이 거의 비슷하다. 표정이랄 것이 없는, 심오함이 어려있다. 두 사람 모두 극작을 위주로 썼다. 노르웨이에서는 입센 이후 최고의 극작가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욘 포세의 [저 사람은 알레스]는 소설 형식을 띄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소설과는 너무도 달라서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정신없이 읽고 있는 나를 문득 발견했다. 다 읽고 생각해보니 이렇듯 단숨에 읽은 이유는 재미있는 스토리를 갖고 있어서도, 문장이 찰떡같이 달라붙어서도 아닌… 문장에 마침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표가 없는 문장. 모든 문장은 쉼표로 이루어져 있었다. 쉼표는, 쉬기 위함이 아닌, 오히려, 쉬지 않고 읽으라는 의미 같았다, 숨이 가빴고, 찰나 같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의식의 흐름’ 기법과 비슷했으나 의식의 흐름을 뛰어넘고, 시간의 연속성을 뛰어 넘고, 이야기의 연속성을 뛰어 넘었다.
모든 문장은 반복되었다. 반복되었고, 또 반복되었으며 잊혀질만 하면 그 문장이 또 반복되었다. 마치 혼잣말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작가는 되뇌이고, 되뇌였다. 시점은 화면의 디졸브처럼 어느새 그에서 그녀로 바뀌어 있었고 그녀에서 그로 바뀌어 있었고 그에게서 그의 조상으로 바뀌어 있었고, 다시 어느 순간 그녀가 되어 있었다. 시간 또한 지금이던 시간이 과거가 되었다가 다시 과거의 과거가 되었다.
소설에서 흐르지 않고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장소였다. 장소는 한치도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혹은 그녀의 혹은 알레스의 혹은 알레스의 손자의 집. 그리고 그들의 집 앞에 펼쳐진 피오르드와 검은 바다, 잿빛인 겨울의 하늘, 부서진 보트, 타오르는 난로, 식탁, 소파.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바다가 늘 언제나 바다인 것에 충실하듯이. 그리고 그 장소를 가만히 죽음이, 상실이 에워싸고 있다. 세대를 흐르는 상실이었다. 상실할지 모르는 불안이며, 소중한 이를 잃을지 모른다는, 그리고 결국은 잃고야 마는 쟂빛의 사무친 추위 같은 차가운 슬픔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다.
욘 포세의 인터뷰에 따르면,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연주했고, 바이올린과 기타로 록이나 고전음악을 병적으로 연주했다고 했다. 그러다 열 여섯살에 음악을 그만두었긴 하지만. 그런 이유로 글을 쓸 때 단어가 의미하는 바와 인물과 이야기 같은 것은 신경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 어떤 것도 신경쓰지 않으며, 그저 ‘일종의 음악적 구조’에 빠져든다고 했다.
작가로서 내가 흥미를 갖는 것은 심리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성격의 원형을 묘사한다. 나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고 싶다. 정체성이 아니라 여러 관계들이 우리의 삶을 조종한다. (중략)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인물들이 서로에 맞서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들이 그들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는가, 그들 사이에는 어떤 소리가 존재하는가다.
- 욘 포세의 인터뷰 중에서
삶은 슬픈 것 같아요.
스무살이던 한 청년의 말이 다시 떠오르던, 욘 포세의 ‘저 사람은 알레스’.
싱네와 어슬레. 노르웨이와 피요르드,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소설.
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