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의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무라마츠 마리 씨가 웃으며 내게 말한다.
- 무라카미 하루키가 노벨문학상을 못 받아서 많이 섭섭하죠?
내가 하루키의 광팬이라는 걸 아는 마리 씨는 내 한국어 수업 학생 중 한 명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노벨문학상 수상을 받지 못했단 이유로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일본인에게 위로를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다.
마리 씨는 나의 시어머니와 같은 연배이시고 동시에 무라카미 하루키와도 동갑이신 분. 깨끗한 피부에 흰머리는 염색하지 않은 채 은빛으로 멋지게 커트를 하고 다니신다. 대화를 나누고 나면 ‘아 멋진 여성이다!’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분이다. 한국어를 배우시게 된 건 한국 작가 최인호의 <상도>를 일본어 번역으로 읽으신 뒤 큰 감동을 받으셨기 때문이라 하신다. 마리 씨는 윤동주 시인의 시도 무척 좋아하신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의 일본 감옥에서의 죽음을 슬퍼하고 계셨다. '별 헤는 밤'이나 '서시' 같은 작품은 다 외우셔서 즉석으로 낭송하실 수 있다.
꽤 오랜 기간 봉사했던 한국어 교실의 할머님들은 다들 좋으신 분이지만 무라마츠 마리 씨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여름 계획에 대해 말하는 시간을 갖다가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은 해외여행을 가면 꼭 현지의 미용실에 들른다고 하셔서 조금 놀랐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헤어 스타일을 걸고 하는 모험은 하지 않는데!
자신은 모험심이 강해서 꼭 현지의 미용실을 무작정 가곤 한다며 늘 너무 재미있는 경험이었다고 했다. 오래전 호주 여행을 했을 때 브리즈번의 한 미용실에 갔는데, 그곳에서 멋진 헤어 커트를 제안받고는 지금도 그때의 스타일 그대로를 고수하고 계신다고 했다. 중국의 한 미용실에서는 샴푸를 할 때, 물이 없는 채로 할지 물을 적신 채로 할지를 물어봤다고 한다. 물론 그 미용실에서만 그러는 건지 어쩐지 지금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더운 여름에는 북쪽 지방의 별장으로 두어 달 떠나시는 마리 씨. 그곳은 산속이라 여름 내내 에어컨도 선풍기도 필요 없고 밤에는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고 했다. 숲 속에는 곰이 있기 때문에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도. 뜨거운 여름밤을 에어컨으로 달래며 잠을 청할 때마다 나는 상상하곤 했다. 깜깜한 산속에서 마리 씨가 두꺼운 이불로 몸을 둘둘 만 채 잠에 빠져있고, 그 집 주변을 커다란 곰 한 마리가 뱅글뱅글 도는 모습을.
어느 해 여름 방학에는 마리 씨가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탈리아에서 꼭 메일 보낼게요~" 하셨던 약속을 정말로 지키시고 짤막한 한국어 문장으로 이메일을 보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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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에게
안녕하세요?
오늘은 시칠리아섬의 타오르미나라고 하는 아름다운 거리에 왔습니다.
내일 이 거리를 관광합니다.
매일 맛있는 요리나 와인 때문에 살찌었습니다.
정말로 와서 좋았습니다.
무라마쓰 마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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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기를 돌리신 것일 수도 있고 열심히 직접 작성하신 것일 수도 있지만 바쁜 일정 중에 약속을 지켜주시니 정말이지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었다. 나는 ‘타오르미나’라는 곳을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타오르미나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에 위치한 멋진 관광 명소라는 설명과 함께 모니터에는 그리스식 원형 극장과 운치 있는 거리 이미지가 주르륵 떴다. 언젠가 타오르미나를 여행하며 나도 무라마츠 마리 씨에게 메일을 보내드리고 싶다.
한국어 교실에서는 상반기의 종강일에는 늘 발표회를 했다. 어느 해의 발표회에 우리 반에서는 제비 뽑기를 통해 쿠마자와 씨가 발표자로 정해졌다. 쿠마자와 씨는 한국어교실 학생 중 두 번째로 연세가 많은 분으로, 돌아가신 남편분은 목사님이셨다고 한다. 목사님 사모님으로 살아오셨지만 아주 장난기 많고 쾌활한 분이시다. 가끔은 숱이 많은 풍성한 머리카락에 조그만 보석을 달아 반짝이게 하는 시술을 받고 나타나시기도 하시는 초멋쟁이이시기도 하다.
발표 주제는 ‘요즘 내가 빠져있는 것’. 한국어 실력이 아직은 부족한 부분이 많으셔서 미리 문장을 봐드렸다. 문장 하나하나 다 손을 봐야 할 만큼 문법은 아직이지만 내용이 참 좋았다.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의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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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랫동안 그림책 읽기에 빠져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초등학교 일 학년이나 이학년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좋아하는 책을 손에 들고 나무에 올라갔어요. 고향 친정의 뒷마당에 큰 비파나무가 세 그루 있었어요. 그 좋아하는 나무에 방석과 책을 가지고 올라가서 저녁때까지 있었어요. 배가 고프면 비파 열매를 비틀어 떼어서 먹었어요. 비파 열매의 씨는 커서 입으로 기세 좋게 내뱉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여러분도 오늘은 좋아하는 그림책을 하나 골라 읽어보는 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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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림책을 좋아하지만 비파나무는 처음 들어보았다. 그날 가져오신 그림책 한 권을 빌려 집에 돌아와 아이와 함께 읽었다. ‘트리하우스‘라는 제목의, 발표하신 내용과 딱 맞아떨어지는 그림책이었다. 트리하우스는 톰소여의 친구 허클베리핀을 생각나게 한다. 사람마다 그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추억은 각자 따로 있는 것이다.
한국어교실의 올드레이디들을 알기 전, 솔직히 말하자면 일본 할머니들이 자신들보다 30~40여 살 정도 어린 한류 스타가 좋아서 한국어를 배우려 한다는 것에 대해 그다지 탐탁지 않았었다. 특별히 배우나 가수에 빠져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어떤 선입견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마리 씨와 더불어 내가 가르친 한국어 교실 분들을 만나게 된 후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이 한류 드라마와 한류 스타에 열광하는 건 그저 잘생긴 어린 남성들에게 무턱대고 빠져드는 이유 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지나가버린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게다가 또래 친구들과 같이 공감할 수 있는 문화생활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분들은 가부키 공연이나 다카라즈카(여성극단) 공연을 정기적으로 보러 가는 것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한류스타의 팬미팅에도 정기적으로 참석한다. 일본에 공연하러 오는 헤드윅 뮤지컬 티켓을 구했다며 뛸 듯이 좋아하시는 분도 있었다. 같이 손을 잡고 즐거워해주며 그분들의 마음에 이입해본다. 우리는 다들 젊은 날의 시간들이 사실은 매콤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애써 아름다운 추억들에만 조명을 비추며 기억하려 하는 것이다. 어린 스타를 좋아하면서 가장 빛날 때의 자신을 불러내보는 것.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관련 산업의 마케팅의 대상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지라도.
어느 날 수업 중에 내가 ‘한국에는 인생은 60부터 라는 말이 있어요.’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무라마츠 마리 씨는 정말 정말 그렇다고, 인생은 진실로 60부터라고 강조하셨다. 60세가 되면 삶의 희로애락 중 슬프고 힘든 감정에 크게 좌우되지 않고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고 하셨다. 정말일까. 그런 걸까. 적어도 마리 씨의 말은 진실되게 들렸다. 주변에 활력과 따스함을 선사하는 분이라고 생각하며 나도 그렇게 익어가는 올드레이디가 되고 싶다. 인생이 60부터라면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니 가능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를수록, 연륜을 거듭할수록 늙어가지 않고 익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쌀은 쌀인 채 그냥 두면 먹기 어렵지만 물을 부어 뜨거운 온도를 가하면 밥이 되어 어린아이의 입에도 고슬고슬 들어가고, 피로에 지친 중년의 위에 녹아들어 가며, 이가 성치 않은 노인의 위에도 차곡차곡 쌓여 그 따스함에 위로받는다. 쌀 같은 사람 말고, 밥 같은 삶을 살아가야지. 쌀 같은 글 말고, 밥 같은 글을 쓰고 싶다.
그렇게 약 7년 여의 시간 동안 한국어교실에서 올드레이디들을 만났다. 한국어교실이 종종 일본어교실로 전환하곤 하던 우리 반. 한국어 교사인 내가 일본어를 배우는 학생으로 너무 자주 위치 전환되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니 일본어보다는 그들의 크고 작은 가르침을 배우는 순간들이었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 교실은 잠정적으로 휴교 중이다. 친애하는 올드레이디들이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바라며.
“우리는 인생의 오후로 들어서는 일에 철저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중략)
그러나 인생의 오후를 인생의 오전의 계획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 칼 구스타프 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