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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어지럼증인가, 지진인가

by 해처럼


일본 생활 중에 난생처음 겪은 일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사건은 뭐니 뭐니 해도 ‘지진’이었다. 일본에서는 한 해 평균적으로 2000회 정도의 사람이 감지할 수 있는 지진이 일어난다고 하니 그 정도면 거의 흔들림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처음 겪었을 때는 공포보다는 신기함이 앞섰다. 아이쿠야, 내가 어지럼증이 다시 도졌구나… 어이없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갑자기 찾아온다는 점에서, 그리고 내 의지로 컨트롤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어지럼증과 지진은 닮아있긴 하다. 지진이라는 걸 알고는 땅이 바다처럼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꿀렁꿀렁하게 흔들리는 대지라니! 흔들거리는 집에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잔잔한 바다 위를 표류하는 한 척의 배에 승선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무료하게 흔들거리는 재미없는 놀이기구를 탄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몰입해서 볼 수밖에 없었던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는 일본의 지진을 일으키는 힘을 거대한 지렁이로 형상화했다. 지진이 오면 정말로 땅 속 거대 생명체가 꿈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일본에는 실제로 고대부터 그런 신화가 있다고 한다. 다만 <스즈메의 문단속>처럼 지렁이가 아니라 거대한 메기가 요동치고 있다고 믿었다는 것.



잦은 지진으로 인해 터득한 진리도 있다. 갑자기 몸이 움직이는 느낌을 받는다, 그럴 때 ‘어, 지진인가?’하면 아닐 가능성 80퍼센트. 정말 지진이 왔을 때는 뒤에 물음표가 붙지 않는다. 오직 느낌표만 사용한다.

앗, 지진이다!!!!!!!!



막상 큰 규모의 지진이 시작되면 멍해져서 그저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진이 오고 모든 것이 흔들리면 그 순간 일상은 일단 멈춤이 된다. '지진'이라는 것에만 집중한 채 머릿속에서 오직 그것만 생각하게 된다. 평온한 일상에 느닷없이 쾅쾅 현관문을 두드리는 낯선 방문객처럼 지진이 일상 속에 찾아오면 사람들은 그저 숨죽인 채 조용히 그것이 돌아가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다 보면 곧 발길을 돌리겠지, 기대하며.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우리 가족은 거대한 지진을 경험한 적이 없다.



2011년에 311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마침 우리 삼인조는 일본에 없었다. 바로 전날인 3월 10일에 한국으로 가족을 만나러 갔던 것이다. 3월 11일 오후 한적한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TV 화면이 일본의 어느 해안가를 덮치는 거대한 쓰나미로 도배되었다. 검은 물결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는 광경이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너무 놀라 일본에 있는 지인들에게 연락을 취해 보았다. 다들 경황이 없는지 제대로 연락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 뉴스에서는 후쿠시마의 원자력 시설의 균열 소식이 터져 나왔다. 쓰나미보다 더 무서운 방사능 공포가 일본을 덮쳤다.



그로부터 한 달 동안 나는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남편은 일주일 정도 후에 도쿄로 돌아갔지만 네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도쿄로 돌아가는 건 무리였다. 도쿄의 지인들도 어떻게든 비행기표를 구해서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남편의 말로는 생수를 구하기도, 쌀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게다가 여진이 계속해서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상황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았을 때에야 아이를 데리고 유치원 입학식에 맞추어 도쿄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대지진의 날에 겪었던 공포와 혼란을 지치지도 않고 이야기해 주었다. 전철, 버스 등 모든 교통수단이 멈춰 4시간 동안 걸어서 집에 갔다는 이야기, 아이와 연락이 되지 않아 엉엉 울며 학교로 뛰어갔다는 이야기, 자전거 가게에 사람들이 끝도 없이 줄을 서서 자전거를 구입해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 등등 사람들마다의 사연이 넘쳐났다. 고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냉장고가 넘어지고 그릇장이 뒤집어져 모든 그릇들이 다 깨졌다고 했다. 당시 우리 집은 2층이어서였는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고 선반 위에 올려둔 곰인형 하나만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는 남편의 증언이 있었다. 조그만 어항의 물도 넘치지 않아 물고기들도 모두 무사했다. 놀이터의 아이들은 ‘지진이다!’라고 누군가 외치면 모두 어딘가에 숨는 놀이를 하며 놀았고, 나는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지역의 식재료들을 구하느라 여러 개의 슈퍼를 돌아다니곤 했다.




대지진의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의 삶의 태도는 크게 변화했다. 지진은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상당 부분 뒤흔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 일이 앞으로도 언제든 다시 겪을 수 있는 재해라는 것을 실감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미니멀 라이프 붐이 일어난 것도 대지진 이후 사람들의 의식 변화가 원인이라는 분석이 있다.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재해 앞에 많은 물건들의 '쓸데없음'에 대해 그들은 깊이 절감했던 것이다. 나 역시도 그 흐름을 타고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물건들을 대부분 정리했다. 4.5리터 쓰레기봉지가 대여섯 개 정도 채워질 정도로 굳이 끼고 있지 않아도 될 것을 전부 처분했다.

사람이 무언가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딱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과거에 대한 집착'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고. 그런 점에서 과거에 대한 집착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자연 앞에서의 속수무책에 힘을 잃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다. 인간의 연약함과 유한함에 대해 피부로 생생히 체험했기 때문에.



어느 새벽, 나는 한창 꿈을 꾸고 있었다.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떤 일을 처리하느라 분주한 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입이 위아래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입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경험은 처음이야..... 생각하고 있는데 본격적으로 몸까지 흔들려서 잠이 깼다. 지진이었다. 꽤나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자고 있던 딸아이는 엄마 지진이야! 하고 큰 소리로 말하더니 바로 다시 잠들어버렸다. 남편은 출장 중이었고,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다가 나도 모르게 다시 잠들어버렸다. 세 시간쯤 더 자고 일어나 지진이 나는 꿈은 아니었을지 확인해 보니 도쿄에서 꽤 가까운 곳에서 지진이 발생했다고 한다.

자고 있을 때건, 밥을 먹을 때건, 샤워할 때건, 때를 가리지 않고 땅의 꿈틀거림은 찾아온다. 지진 대비 비상가방을 만들어 소파 아래에 두고 구청에서 보내주는 지진대비 매뉴얼을 늘 가까이 둔다. 저것이 바로 일상 속의 비상이라는 것을 그 물품들을 보며 체감하곤 한다.



지진이 잦으면 잦은 대로, 지진이 너무 뜸하면 뜸한 대로 대지의 에너지가 너무 응축되는 건 아닌지 불안해진다. 일본에 살고 있는 한 언제 올지 모르는 이 공포는 디폴트 값처럼 끌어안고 살아가는 수밖에. 에혀.



나는 도쿄를 대지진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겁니다. 카타기리 씨,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개구리군 도쿄를 구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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