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경단녀’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특별히 믿는 구석이 있어서는 아니고 아예 ‘경력단절‘이라는 용어 자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결혼 후 일본에서 살기 전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끊임없이 경제 활동을 해왔다. 남편을 따라 일본에 오면서 그저 ‘지금은 잠시 남편이 돈을 벌고, 조금 지나면 그를 쉬게 하고 내가 벌어야지’ 정도의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던 철없음 그 자체였던 시절 이야기다.
최초의 경제활동은 대학 입학 후 과외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초, 중, 고 두루두루 다양한 학령대의 아이들을 짬짬이 가르쳤다. 나의 첫 번째 학생은 초등학교 4학년 남자아이였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은 짐작컨대 방과 후 케어를 목적으로 과외를 신청하신 것 같았다. 초등 1학년이던 여동생이 덤으로 붙어 있었다. 인상 좋은 어머님은 ‘오빠가 과외하는 동안 얘는 그냥 옆에서 놀게 하시면 돼요~’라고 가볍게 말씀하셨지만 말이 쉽지 인생에 쉬운 일이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하물며 돈을 버는 일인데 말이지. 오빠가 수학문제를 풀 동안 여동생에게는 한글 따라 쓰기라든가 그림 그리기를 하도록 했다. 남자애는 말이 많은 아이였는데 그렇다고 버릇이 없거나 한 것은 아니고 이것저것 호기심이 많았다. 공부를 하다가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동화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고, 고민을 들어주기도 했다. 여자아이는 지루해지면 인형을 가지고 놀거나 좁은 실내에서 세발자전거를 타거나 했다. 약속했던 시간은 1시간이었지만 부모님이 저녁 늦게 퇴근하는 상황을 아는 나로선 아이들을 그냥 두고 나오기에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거의 두어 시간을 그 아이들과 함께 있어주곤 했다. 그런 식으로 몇 달을 지속하다 내 쪽에서 지쳐 그만두게 되었지만.
가장 효율감을 느꼈던 건 중학교 3학년 학생을 가르쳤을 때였다. 무뚝뚝한 얼굴에 여드름이 적당히 돋아난 말수 적은 남자아이였는데 수업을 꽤 잘 따라와 주었다. 나는 모든 학년을 통틀어 중3 수학에 가장 자신 있었는데, 중학교 3학년 수학 선생님이 지구에서 가장 무서운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성함도 잊지 못한다. 요리의 대가, 백종원 님과 동명이인이었다. 가르쳐주지도 않은 문제를 칠판에 쓱쓱 적고는 나와서 풀어보라고 하시는 통에 기겁한 나는 모든 단원을 미리 예습하여 완벽하게 숙지하고 수업에 임했다. 그때만큼은 수학 점수가 95점 이하로 내려가 본 적이 없었다. 공포 학습으로 단련된 그 실력으로 아이를 가르쳐서인지 과외 후 첫 수학 시험에서 아이 성적이 크게 올랐다. 아이도 부모님도 기뻐했고 나도 엄청난 보람을 느꼈다. 더 기뻤던 건 아이 친구 한 명을 더 가르치게 된 것이었다. 따로 시간을 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두 아이를 가르치니 에너지 대비 수입이 두 배가 되었다. 두 아이 모두 성적이 올랐다. 그러자 두 아이가 더 왔다. 내 지갑의 부피와 물욕이 차오름과 동시에 아이들의 집중력은 조금씩 흐트러져 갔다. 역시 네 명을 동시에 수업하는 것은 집중도면에서 무리였다. 수업은 산만해졌고 모두에게 그 상황은 마이너스였다. 과외는 지속되지 못했다. 지금은 다들 사회의 든든한 구성원으로 자라 있겠지. 나름대로 즐거운 경험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사서를 보조하는 일도 했다. 디지털화가 진행되기 직전이어서 도서관 대출이 종이로 된 카드로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나는 대출 카드를 정리하고 다시 원위치에 꽂아놓는 일을 했다. 친절한 사서님의 실루엣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그 밖에 학교 내 교수식당에서 배식하는 일도 했는데 전공 교수님이 오시면 반찬을 조금 더 드렸다. 학점도 실력보다 더 잘 주십사, 하던 그 마음 아셨으려나.
졸업 후에는 뜻한 바(?) 있어 방송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몰랐지만 직업명에 ‘작가’라는 말이 들어있으니 글을 쓰는 일이겠거니 생각했다. 글로 먹고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던 터였다. 가장 관심 있던 분야는 휴먼다큐였다. 나는 무엇보다 ‘인간’에 관심 있는 인간이었다. 다큐의 주인공인 찍히는 사람도, 그것을 찍는 제작자 사람도, 완성된 방송을 보는 시청자 사람의 마음도 마구 흔들릴 그런 문장을 아니 멘트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휴먼 다큐 쪽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고, 가요 프로그램을 하다가 조금 무거운 주제의 토론 프로그램을 했다. 이후에는 퀴즈 프로그램을 했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즐겁게 10년을 일했다. 여러 상황들이 휘몰아쳐 남편의 손을 잡고 그 세계를 떠나왔다. 12시가 되어 무도회장을 서둘러 떠난 신데렐라처럼. 어디까지나 잠시 쉬는 거야~라는 한가한 생각을 첨부파일로 갖고서.
낯선 나라에 온 나는 말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이 어설펐다. 일본어에 있어서만큼은 어린아이와 동등한 신분이었다. 그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벅찼다. 혼자서는 공문서 한 장도 쓸 수 없었다. 스스로 치밀하게 새로운 나라에서의 취업을 준비하며, 자 지금이야! 를 실천한 것이 아니여서였던 걸까. 나는 허둥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린아이가 태어났고 엄마가 되었다. 무게중심이 내 쪽에서 곧바로 아이로 옮겨갔다. 나는 꼼짝 마의 상태로 아이에게 내 시간을 모두 주었다. 행복했으나, 경제활동 면에서는 바로 그 문제적 ‘경력단절여성’의 굳히기에 들어선 것이다.
아이를 키우고, 먹이고 입히고 또 가르치며 문득 ‘나는 어디로 갔을까?‘의 대답 없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희뿌연 구름이 끼어있는 하늘처럼 막연한 질문들이 내 뒤편으로 후루룩 지나가곤 했다. 그래도 예쁜 아기와 그 아이를 닮은 남편과 하하 호호 웃으며 행복했다. 하루가 지나가고, 또 다른 하루가 지나갔다. 나는 보송보송하게 마른빨래를 보며 기뻐하고 청소를 마친 반짝반짝한 집을 돌아보며 뿌듯해했다. 가끔은 그런 자신이 낯설었다. 지갑을 탈탈 털어봐도 나를 어필할 사회적 명함 같은 것은 없었다. 때로 내가 본질과 부록이 뒤바뀐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들었다. 점점 사회적 경력과 가족을 돌보는 것 중 어느 것이 본질이고 부록인지 경계가 모호해졌다. 무엇을 할 때 진정한 내가 된다고 여기는지 유심히 생각해 봐도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중심을 다시 잡은 계기가 있었다. 한 커뮤니티의 아이 키우기가 너무 힘들다는 게시글 아래 누군가 적은 한 줄의 댓글이 답을 주었다. 무심한 듯 적혀 있는 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사는 거예요.”
툭 던져둔 한 마디에 깊이 깨달았다. 달리 이유가 없었다. 변명도 할 수 없다. 부모는 아이를 위해 사는 것이다. 다른 모든 자신의 가능성들을 배제하라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된 나’는 다른 이유 없이 아이를 위해 사는 것이 맞았다. 그게 정답이었다.
시간은 두 세배 빠르게 재생된 동영상처럼 아찔한 속도로 흘렀다. 블로그에 짬짬이 일상의 단상들과 육아에 대한 생각을 적어가던 어느 날, 글을 본 유아 잡지사 기자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덕분에 도쿄 통신원으로 일본의 육아 문화에 대한 칼럼을 잡지에 기고하게 되었다. 일본 아빠들의 육아 참여도라든가 어린이 독서문화, 이유식, 어린이날 등 다양한 테마로 글을 썼다. 통신원 활동을 통해 일본 부모들의 육아나 교육관 등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조금 더 시간이 생겼고, 기회가 되어 한국어교사 자격증 과정도 시작할 수 있었다. 사이버 과정이어서 학교를 오가거나 하지 않고 집에서 취득할 수 있어 가능했다.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 일본의 한 기업에서 의뢰받아 한국어 수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회사 측에서 직접 대면하는 수업을 원해서 꽤 먼 거리였지만 전철을 타고 다녔다. 그동안 아이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 시간 동안 한국에 계신 시어머니가 아이와 화상채팅을 켜두고 함께 있어주시는 것으로 해결했다.
방송일을 그만둔 지 15년도 더 되어가던 어느 날, 뜻밖에도 다시 방송대본을 쓸 기회가 생겼다. 일본에 한류붐이 불고, K-pop의 영향력이 거세진 여파가 나에게까지 밀려왔던 것이다. K-아이돌 그룹들의 일본 현지 활동 콘텐츠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늘 무거운 주제들을 풀어가는 프로그램을 하다가 밝고, 재미있고, 경쾌함을 찾는 프로그램을 하려니 생소했지만 나름의 즐거움과 의미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근저에는 애국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거창한가?
가끔 놀라운 것은 20대부터 끊임없이 고민해 온 ‘무슨 일을 해야 하지?’라는 일생일대의 난제를 지금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이의 도시락과 가족들의 아침밥을 챙기면서도 ‘대체 나는 앞으로 뭘 하지?’의 질문이 머리 위에 둥실 떠오른다. 어쩌면 그 질문이 내게서 떠나는 순간이 오히려 진정한 ‘단절’의 길로 들어서는 입구가 아닐까. 같은 질문을 끌어안은 채 무언가를 쉬지 않고 시도하는 동안 나는 이미 경력단절여성이 아닐지도 모른다. 실은 경력단절보다 무서운 건 희망단절, 생각단절, 그리고 나와의 커뮤니케이션 단절이라는 것.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성공이 끝이 아니며, 실패가 치명적인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 나아갈 용기다.
- 윈스턴 처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