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벚꽃의 계절을 맞이할 때마다 '아 정말 일본적이야' 하고 감탄하면서 벌써 몇 해째 이곳에서 벚꽃의 향연을 보며 같은 감탄을 하고 있는지…. 신혼을 시작했고,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가 자라났다. 나는 힘든 투병을 했고, 이겨냈으며, 감사를 배웠고, 많은 이들과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했다.
잠시 한국에 머물다 보면 내가 저 이국땅에서 얼마나 긴장감을 갖고 살아오고 있는지 그제야 실감하게 된다. 어린 날 읽었던 동화 ‘이 빠진 동그라미’의 그 동그라미처럼, 한 조각을 잃어버려 조금은 어설프게 굴러가는 그 모양이 어쩐지 여기서의 내 모습에 겹쳐진다. 지나친 신경과민인지도 혹은 그런 것이 보통의 이방인에게 장착되는 마인드인지도 모르겠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는 모든 상황에서 관대한 태도로 풀어져 있게 된다. 팽팽했던 기타 줄이 느슨해지는 것처럼.
어쩌면 이국땅에서의 긴장감이야말로 오히려 매일매일의 삶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게 만드는 예민한 안테나였음을 알게 된다. 팽팽한 기타 줄이 더 맑은 소리를 내듯, 내가 매일의 날들 속에서 작은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봄마다 피어나는 벚꽃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되었고, 정성 들여 가꾸는 그들의 정원을 같은 마음으로 아끼며, 그들의 예의바름과 배려에 감탄한다. 스쳐 지나간 착한 어린이들과 어진 어머니들과 할머니들, 같이 울고 웃었던 친구들의 정 많음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적응’이란 것은 달리 말하자면 그 자리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지금 자신이 처한 그곳이 어떤 모양이건 어떤 빛깔을 띄고 있건, 거기에서 한 조각의 아름다움을 집어 올릴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적응했다는 의미이며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돌아보니 불행이란 작은 기쁨 하나도 발견할 수 없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곳은 이미 나에게 잊지 못할 인생의 장소가 되었다. 나중에 어디에서건 이곳에서의 시간들과 자잘한 장소들을 깊이 그리워할 것이 분명하다. 삶의 모든 과정이 녹록지는 않았으나 내 의식과 무의식의 캐비닛에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집어 올려 보관해 둘 수 있었으니.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하여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걸어간다. 사실은 ‘미래를 향하여’ 걸어간다는 말은 틀렸다. 그저 걸어가다 당도한 곳에서 만나는 현재가 미래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 뿐.
에세이스트처럼 산다는 건, 어쩌면 너무 보잘것없어서 부스러기처럼 흩어지는 일상의 것들을 그러모아 거기서 반짝이는 것을 찾는 삶의 태도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매일 반복되는 삶 속에서 오늘의 특별함을 찾아내보려 애쓰는 것. 그렇게 조금 더 경쾌한 스텝으로 계속해서 써 나가 보기로 했다.
진짜 에세이스트처럼!
사랑은 돌멩이처럼 그저 꼼짝 않고 있는 게 아니라, 빵처럼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항상 다시 만들어지고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
- 어슐러 르 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