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런 말투에 꽂혔다. 예를 들면, "나랑 하자. 사랑...", "우리 떠나자. 제주도..."
예를 들긴 했지만 그리 좋은 예는 아닌 듯싶다. 사랑과 제주도에 비하면 전기장판은 참으로 소박이 과하다 못해 철철 넘쳐 부끄러울 지경이다. 게다가 오월의 신부. 팔월의 크리스마스 이런 멋스러운 비유도 아닌 오월의 전기장판이라니......
그럼에도 쓴다. 나만의 스토리가 있으니.
겨우내 끼고 살던, 아니 깔고 살던 주황색 1인용 전기장판이다.
지극히 소박하지만, 나에게는 추위를 견디고 버티게 해주는 살림도구 중 매우 소중한 아이다. 이름까지 지어줬다.
[ 따수이 ].
따수이를 걷어내며 생각해 보니,
이 아이는 단순히 겨울 추위에 대한 따스함만 제공해 준 것만은 아니다.
본업인 생계형 밥벌이 직장인의 지친 몸과 마음에 안온함을 아낌없이 내어 주었고,
브런치 작가라는 부캐로서 글쓰기가 막막해질 때의 막연함,
생산적이거나 창조적이지 못하고 마냥 게으르게 지나가는 일상에 대한 죄책감(?)
마저도 잠시 덜어낼 수 있는 쉼터를 제공해 주었기에 그 소중함을 인정받는다. 나에게.
(이런 어순은 별로 인듯하다. 습관 되기 전에 고만하기로 한다.)
당연히 침대도 그 역할이 있겠으나 전기장판 없이는 그 안온함의 완전체가 되지 못한다.
몸에 좋다는 황토도 아니고, 최첨단 엠보싱 안마기능이 있는 것도 아닌, 그저 '천냥 집' 같은 동네 마트에서 쉽사리 구매할 수 있는 그저 흔한 장판이다.
전기장판이 모여있는 구석 코너에 가면 그 아이들은 대부분 주황색이다. 왜 주황일까?
한국 전기장판협회에서 공식적으로 선정한 색은 아닐 테고, 컬러 심리학 측면에서 소비자들의 구매충동을 느끼게 하는데 딱인 색채인지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모를 일이다.
나무 위키는 말한다. "주황은 빨강과 노랑을 합친 색으로 정의, 원기, 약동, 활력, 만족, 유쾌, 적극 등을 상징한다."라고. 또한 이런 분석을 하는 네티즌도 있다. "주황은 불안을 유발하거나 경계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라고. 나무 위키의 지극히 노말 한 정의보다는 네티즌의 분석이 눈길을 끈다.
'불안'. 옳다구나!
외부 온도 25도가 넘어가는 오월말이 돼서야 전기장판을 걷어내는 심리의 근저에는 '불안'이 깔려 있었던 거다. 유난히 추위에 약한 체질이기도 하지만, 어느 해 겨울 타국에서의 극강 추위로 고생했던 몸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남게 된 것이리라. 추위 불안의 가장 큰 원인이겠다. 아이러니 이긴 하지만, 이렇게 장판의 주황이 어느 불안과 맞닿게 되었다.
사업한답시고 중국에 건너가 약 1년 반 동안 좌충우돌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드 사태로 양국 간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던 그해 겨울. 머물던 숙소는 파트너사에서 제공한 아파트. 거의 철거 직전 상태로 낙후되어 바람이 조금만 심하게 불어도 건물 전체의 흔들림이 느껴질 정도다. 절대 농담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전기공급이 끊겼다. 늘 있는 일이란다.
하루하루 패딩점퍼로 극강의 추위를 버텼다. 나는 대한민국 육군. 철원 G.O.P 출신.'악으로 / 깡으로 ' 매일 밤 목놓아 외쳤다.
3주 정도 후에야 전기가 들어왔지만 온방까지 할 정도의 충분한 가동은 더 한참 후에나 가능했다.
그 3주 동안 지옥을 경험한 것이다. 특이점이 온 것은 온 피부에 벌겋게 두드러기가 올라오고 미친듯한 가려움증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서 거의 정신줄을 놓아버릴 정도였다. 수많은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이게 무슨 증상인가... 고생고생하다가, 교포지인의 설명과 도움으로 간신히 그 지옥에서 탈출하였다.
"한랭 알레르기"라 하며, 심하면 호흡곤란이나 쇼크사 까지도 올 수 있는 심각한 병이란다. 추워도 너무 추워서란다.
약국도 병원도 문 닫은 그 밤. 눈보라를 뚫고 지인댁으로 달려가 수제 약초 연고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보자기에 꽁꽁 담겨 함께 받은 것은 다름 아닌 '전기장판' 그 아이가 있었다. 더군다나 Made in Korea 라니...
연고 범벅, 눈물범벅의 그날 밤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극한의 온도는 어느 정도 일까'라는 남의 다리 긁는 질문보다는 그저 '살아야겠다'라는 강렬한 소망을 장판 속에서 불태웠다. 돌이켜보면 그깟 피부질환 정도로 무슨 엄살 인가하다가도 그때 그 시절의 하얼빈은 영화 Tomorrow에서 연출된 지구종말의 영상처럼 나에게 뼛속까지 각인되었고 그것은 추위에 대한 불안으로 체득화 된 것이겠다.
요즘 이런저런 독서를 하던 와중에 또 꽂힌 게 있다. 이번엔 어떤 '어순'이 아니라 단어다. 수많은 단어 중에 유난히 마음에 꽂힌 키워드. '용기'
살아가면서 다양한 용기가 필요하겠고 요구되겠지만 이번에 한 가지는 확실하게 나의 것으로 만들기로 했다. '마음의 추위'로부터 벗어나는 용기. 불안에 대적할 대항마로서 이보다 적절한 카드가더 있을까 싶다.
'여기는내 고국 대한민국 아닌가. 게다가 단 몇 시간이라도 전기가 나가면 들불같이 일어나는 위대한 국민들이 사는 곳 아닌가. 그만 쫄고 그만 떨어라.'
나에게 필요한 수백만 가지 용기중에 하나이겠다. 이렇게 자잘하고 극히 소박한 불안이라도 스스로의 의지로 줄일 수 있다는 경험을 자꾸 쌓아보기로 하자. 내 삶에 켜켜이 쌓여있는 크고 작은 수많은 불안도 결국은 한걸음 내딛는 용기의 발걸음에서 그 극복은 출발하리니.
이렇게.
책이 우리에게, 나의 곁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독서로, 책으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동서고금의 철학자, 성인, 작가의 말을 나는 철썩 같이 믿는다.
그 용기의 실천 액션플랜으로서,
내년에는 따수이를 4월 즈음에 걷어보기로 미리 용기를 가져본다. (겨우 한 달 단축? 하여튼 내가 봐도 소심한 인간이긴 하다. 하지만 어떠랴. 그 기준은 내가 정하면 되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