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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섭 Mar 13. 2024

괜히 웃긴 날


<문장, 필사적 공부> - Day 9


에고이스트가 아니면 글을 못 써. 글 쓰는 자는 모두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서 쓰는 거야. 자기 생각에 열을 내는 거지. 어쩌면 독재자 하고 비슷해. 지독하게 에고를 견지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만인의 글이 되기 때문이라네. 남을 위해 에고이스트로 사는 거지.

- 김지수, 이어령,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P.30




Mission :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경험과 비밀, 글로 써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가? 지금 펼쳐보자. - 김선영, <따라 쓰기만 해도 글이 좋아진다> P.103




항구의 눈은 안개처럼 온다. 야단스러운 비나 사나운 바람과는 달리 아스라이 다가오니, 눈은 안개의 먼 친척이다. 새벽에 오는 함박눈은 무거우니 더욱 과묵하다. 3월의 봄 내음을 코앞에 둔 2월 어느 날, 동네 사람들 모두 잠든 그 새벽, 폭설이 오셨다.


산동네 고지대 우리 동네 초입은 제설차마저 엉금엉금이다. 출근길이 잠시 걱정됐으나 당황하지 않는다. 나는야 35년 차 직장인 나부랭이 이면서 또한 산전, 수전, 공중전, 눈과의 육박전에 빛나는 철원의 용사 예비역 육군 병장 호병장이다. 새털 같은 지난날 중에 이런 날이 어디 하루 이틀이란 말인가.

묵묵히 산책룩에서 전투복으로 갈아입는다.


낡은 자동차의 가녀린 브레이크 라이닝을 생명줄인양 부여잡는다. 유격대 밧줄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동아줄에 목숨걸고 시동 건다. 힘차게 외쳐야 할 여자친구는 없으니,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으로 대신한다.  "64번 올빼미 하강 준비 끝". "하강!" 요리조리 미끌 비틀 거리며 기어이 해발 70미터 태산준령 설산을 내려와 회사로 향한다. 일상이 전쟁이라 하니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의 생업은 진땀 나게 숭고하고도 경건하다.


사무실이 캄캄하다. 암흑 속에 또아리를 튼 사자처럼 웅크린 사장님이 어흥하며 벌떡 일어나 신경질 낸다. "변압기 터져서 오늘 공장 못 돌리니 모두 귀가하세요. 강제휴무!"

직원들을 대표해서 내가 한마디 한다. "아니, 어떻게 온 길인데 다시 돌아가라니요. 사장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수출물량 납기가 빠듯한데 이를 어쩌죠? 정말 큰일입니다."


말의 표면에는 걱정이 번드르르한데 말속에는 왠지 모를 미소가 차르르르 번진다. 이런 뻔뻔한 인간이라니. 쓰는 자가 된 이후로 진실되고 솔직하게 살아가자 다짐하며 선언했거늘, 자신의 뻔뻔함에 화들짝 놀란다. 내가 이런 인간이었어? 좀 뻔뻔한 마음으로 자신 있게 쓰라했지, 인간 자체가 뻔뻔해져도 될 일인가? 반성하고 놀라면서도 발걸음은 잽싸다. 사장님 마음 변하기 전에 서둘러 정문을 나선다. 사시사철 실버 그레이 색깔인 공단의 하늘이 반짝 선명하게 빛난다. 청량한 이슬 빛이다.

노는 게 그리도 좋으냐. 아. 이런 파르라니 얄팍한 인간이여.


산동네 달동네 우리 동네는 세상하양 눈꽃대궐 차리인 동네가 되었고, 나부랭이씨는 철없는 어린이가 되어 그 속에서 천방지축 뛰논다. 육군병장 호병장은 DMZ 지뢰밭을 요리조리 잘도 피하며 뛰노는 한 마리 꽃사슴이 되었다. 이게 웬 횡재인가. 참으로 아름다운 겨울왕국이로다. 눈이 시리도록 설경을 찍고 저장은 깊은 마음 속이다. 너무 아파, 애써 외면했던 겨울을 새로이 발견한다.


이상한 날이 있다. 목숨 걸거나 눈물 나게 살아가는데, 괜히 웃긴 날이 있다. (사장님께는 좀 미안하지만) 신께서 어느 날, 툭 던져 준  선물 같은 날이 있다.


우연 속에 발견하는 빛나는 날은,

일상 속에 눈 밝혀 맞이해야 할 반짝이는 순간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일상이 전쟁이라면

순간이 선물이다.

흐릿한 내 눈이 못 보고 지나왔을 뿐.


사는 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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