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김홍신 작가의 <겪어보면 안다>를 읽었다. 연세가 얼추 80대쯤 되셨을 터인데, TV광고에서 뵌 선생의 모습은 여전히 정정하셨다. 책을 펼지기도 전에 당장 <인간시장>부터 떠 오른다. '장총찬'! 악행을 일삼는 정치인들, 썩어빠진 탐관오리들, 이런저런 나쁜 인간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혼내주고 응징하고 야단치던 우리의 주인공. 불타는 정의감에 빠져 있던 젊은 나는 장촌찬에 얼마나 열광하였던가. 표창 던지고 젓가락 날리던...(이건이외수 선생이었던가?) 아무튼, 우리네 청춘들이 엄혹했던 그 시절을 버텨온 건, 그럴 수 있었던 건, 마땅히 문학의 힘이 크다고 믿는다. 김지하가 있었고 고은이 있었다. 최인호, 박경리, 박노해, 황석영 그리고 전인권이 있었다. '장총찬'의 여자친구? '다혜'였던가? 마침 책에서, 선생은 다혜라는 이름이 당시 호형호제하던 최인호 선생 따님의 실제 이름이라고 고백한다. 오호라. 신기하도다. 청년시절에 너무도 빠져 읽었던 책 <인간시장>. 선생의 대표작이자 밀리언셀레임에 틀림없다. 기억력 별로인 내가 수십 년이 흘러도 여주인공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니 말이다.
<겪어보면 안다>의 몇 문장을 적어보자. 굶어보면 안다, 밥이 하늘인 걸 목마름에 지쳐보면 안다, 물이 생명인 걸 일이 없이 놀다 보면 안다, 일터가 낙원인 걸 잃은 뒤에 안다, 그것이 참 소중한 걸 ...... 삶의 연륜과 내공 깊은 문장들이 수두룩하다. "살아 있음은 가장 확실한 기적입니다."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책을 덮고 깊은 호흡을 하고 으라차차 기지개를 켜니, 아. 어느새 가을이다. 아. 비 온 뒤 눈 떠보니 가을이다. 새벽 기온이 17도란다. 손가락이 시리고 저릴 지경이니 참으로 어이상실이다. 30도에 가깝던 새벽 기온이 갑분 17도라니... 어이상실을 뒤로 물리고, 선생의 명 문장 뒤에 슬그머니 한 문장 추가해 본다. "계절이 손바꿈 하고 나면 안다, 세월이 흐르고 있다는 걸" 에휴... 울림도 없고 감동도 스토리도 없다. 너무도 뻔하니 뻔뻔한 문장이다. 그저 초보 작가의 패기라고 해두자.
이제, 유난했던 올여름과의 이별파티를 해야 할 시간이다. 아무리 왕짜증 내고 머리채 잡고 트잡이하던 사이라 해도 송별회는 해줘야 한다. 그래야 눈치채고 알아채고 간다. 냉장고에 돌아다니던 냉동 삼겹살 몇 조각을 휘리릭 잡아채 구워 놓는다. 작은 종지에 찍어 먹을 소금을 담는다. 다음 순서는 참기름. 소금에 참기름을 넣어야지 하다가 오뚜기 제일 작은 사이즈 참기름병을 책상 위에서 툭 쏟아버렸다. 하. 세상 서투른 요알못이여. 내가 나에게 표창을 던지고 싶다. 이를 어쩌나. 참기름은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책상머리는 온통 참기름 세상이 되었고 나는 이런 허당을 도대체 어쩌면 좋으랴 혀를 툭툭 발로 차면서 행주를 찾아 주방으로 뛰었다. 다시 책상머리로 돌아온 그 몇 초 사이, 허름한 방구석은 온통 고소한 향기로 가득 채워졌다. 샤랄랄 라라라~라. 아. 참깨기름꽃이 온 세상에 피었구나.
아. 이모. 여기 한 문장 추가요. "쏟아보면 안다, 깨소금 쏟아지던 향기로운 시절. 나에게도 깨볶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는 걸" 그만하자. 울적해진다. 술이나 먹자.
이슬에 젖어 갈수록 자꾸 울적해지려는 나에게 표창 던지려던 내가 두 눈 부릅뜨고 다시 말한다.
여름 가고 세월 가고 오뚜기 쓰러지고 꽃이 진다고 슬퍼하지 말지어다. 이젠 바야흐로 열매가 피어날 시간이다. 이러나저러나 어쨌거나 가을이다. 배우고 알아가는 게 삶이라 하니 그걸 알면 된 거다. 삶은 때때로 불쑥 느닷없이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쏟아내니 정신 바짝차리고 휘리릭 낚아채고 알아채고 배우고 마음에 저장하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