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이라는 불청객을 맞는 자세
쾡한 눈, 축 처진 어깨,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지는 고개, 그늘진 얼굴 표정...
오랜만에 커피 타임을 핑계로 만난 A 팀장은, 제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었어요. 늘 의욕적으로 일하고, 긍정 에너지로 주위를 밝게 만들어주던 타입이었거든요. 너무나 달라진 모습에 놀라서, 괜찮냐고, 무슨 일 있었냐고 물으며 대화를 시작했어요.
"아...그냥 너무 피곤해서 그래요. 해야될 건 많은데,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른 것 같아요."
A의 짧은 대답에, 많은 감정이 느껴졌어요. 그가 해내는 일의 총량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많아 보이는데, 어떤 것들이 A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궁금해지더라고요.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다보니, A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심각하더군요.
"어제도 밤 10시에 퇴근했어요. 저, 주말에도 가끔씩 회사 나와요. 일을 해도 해도 안 끝나서요. 그렇게 야근하고 집에 가면 설거지도 쌓여 있고, 집은 엉망진창이에요. 심지어 저 기다린다고 애들이 안 자고 기다리는데, 얼굴 보면 짠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왜 안자고 여태까지 있나 싶어 짜증이 나기도 하고요."
이렇게 말하며 덧붙이더라고요. 이런 건 누구한테 하소연하기도 어렵다고 말이죠.
"일하고, 아이들 키우고, 집안일하고 이런 건 당연히 성인이라면 해야되는 거잖아요. 제가 힘들다고 말하면, 대안도 없고 다 큰 어른이 찡찡되는 것처럼 들릴 것 같아요. 게다가 제가 팀장인데, 우리팀 실적도 책임져야 하고요."
저는 A의 얘기를 들으며,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어요.
에너지를 활활 태워 더 이상 남은 연료가 없는 상태. 책임감 때문에 간신히 버티고는 있지만, 그 연료마저 바닥나면 그대로 멈춰버릴 것 같은 상태.
그도 그럴 것이, A의 업무는 늘 더해졌으면 더했지, 줄어든 적은 없거든요. 게다가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 늘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회사에서는 열심의 대가가, 더 많은 일이라는 보상(?)으로 주어질 때가 많아요.
"A 팀장이 제일 잘 하잖아. 이번 프로젝트 맡길 사람이 A 팀장 말고 어딨겠어. 하하하하~~"
처음에는 상무님의 이런 달콤한 말이 자신을 향한 칭찬과 인정 같아,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네요. 그러나 지금은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속으로 욕부터 나온다더라고요.
'제발 나 말고, 놀고 있는 B 팀장 시키라고요! 아유 XX.'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님이 설명하신 '번아웃을 부르는 6가지 요인'을 살펴보면, 이런 것들이 있대요.
'Workload, Control, Reward, Community, Fairness, Value'
일이 많고, 내 마음대로 통제가 안 되고, 일을 한만큼 합당한 보상을 못 받은 경우. 공동체에서 은밀하게 따돌림을 당하거나 공정성이 없는 경우, 그리고 일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되죠. 이런 번아웃의 원인으로, 에너지 고갈이나 일에 대한 냉소주의, 업무 효율 저하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거고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번아웃은, 열심히 산 사람한테 찾아온다는 것. A 팀장처럼 일도 육아도 집안일도 잘 해내고 싶은 사람에게 더 자주 찾아오더라고요. 회사에서 주위를 둘러보시면, 쉽게 발견하실 수 있을 거에요. 일에 진심인 사람들, 뭐 하나를 맡기더라도 끝장나게 해내고 싶은 사람들, 특히나 완벽주의자들 말이죠.
열심히 사는 건 결코 나쁜 게 아니에요.
다만, 그 어떤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할 때도 있죠. 열심히 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쉬지 않고 계속 달리면, 결국 멈춰버려요.
"상무님이 시킨 일, 80%만 해봐. 100%, 200%로 해가지 말고."
저의 갑작스런 제안에, A 팀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어요.
"어떻게 상무님이 시키신 일을 빵구내요? 그러면 엄청 혼날텐데...팀이 욕 먹을지도 모르잖아요."
맞아요. A는 일을 성실히 하는 것도 모자라, 상사 지시사항을 200%까지 소화해내는, 슈퍼 초특급 인재에요. 일 에 있어서는 그 원칙을 어겨본 적이 없죠. 이런 사람이 육아나 집안일이라고 해서 다를까요? 똑같은 강도로, 미친듯이 열심히 해요.
"그렇게 살면, 오래 못 가. 그리고 일 빵구내면 좀 어때서? 그 때 되면 B팀장한테도 일 시키겠지 뭐."
저는 굳이 한 마디를 덧붙였어요. 선배 팀장으로서, 내가 겪은 실수를 A는 안 하기를 진심으로 바랐거든요. 일이 전부인양 모든 걸 쏟아 부었다가, 허리도 망가지고, 멘탈도 무너지고,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졌던 나날들. 요즘은 번아웃이 저를 노크를 할 때마다, 스스로를 부여 잡으며 이런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쉬어가도 괜찮아. 너 너무 많이 태웠다!'
저도 알아요.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상황, 미친듯이 불안한 마음. 그런데 배터리가 바닥나 갑자기 멈춰서는 것보다는, 잠깐이라도 쉬면서 충전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하루이틀 일하고 때려칠 게 아니라면요.
여기에 덧붙여 장동선 박사님이 다른 분들의 연구를 통해 제시한, 번아웃 극복법을 몇 가지 소개해보려고 해요.
- 명상하기 : 한가하게 일하다 말고 무슨 명상이냐고요? 그럼 명상이라는 단어 말고, 잠깐 눈 감고 30초간 길게 호흡하기로 바꿔 볼게요.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내 호흡에만 집중하는 거에요. 그러다보면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고, 고요해질 거에요.
- 잠깐 멈춤 : 일을 더 잘하고 싶은 마음, 오늘까지 완벽하게 끝내고 싶은 마음에 'STOP을 외치는 거에요. 명상과 마찬가지로, 진짜 잠깐만 멈춰도 돼요. 잠깐 멈추고 불안한 마음을 들여다 봐요. 잠깐 쉬어 가요.
- 다른 사람과 함께하기 : 번아웃이 오면 다른 사람들과 말하기도 싫잖아요. 그럼 증상은 더 악화된다고 하네요. 나만의 동굴로 들어가는 시간도 분명 필요하겠지만, 좋은 사람들과 커피 한잔을 나누며 속 깊은 얘기를 하는 것도 번아웃 극복에 도움이 된대요.
저는 지금도 잘 쉬는 방법을 잘 몰라요.
그리고 가끔씩은 이런 마음이 들 때도 있어요.
'왜 쉬어야 되지? 그냥 열심히 달리면 되잖아? 나 말고 이 일 책임질 사람이 없는데?'
하지만 인생은, 100m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이더군요. 마라토너들도 뛰다가 물도 마시고, 땀도 식히고 잠깐씩 쉬어 가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오래 달리기 힘드니까요.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분께도 응원과 위로를 전하며, 오늘의 커피챗 마무리 해봅니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잠깐 쉬어가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