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잇과 서점 사이, 가을이 머문다

문장이 익어가는 밤, 심야서점의 가을

by 알렉


아무리 더웠던 여름도 견딜 만해지는 순간이 온다

“가을이다.”
문득 그렇게 느낀다.

바람의 결이 달라지고, 햇빛의 각도가 낮아지면 마음이 먼저 알아챈다.

독서의 계절. 계절이 익어가듯 읽기의 농도도 서서히 짙어진다.

새벽녘의 차가운 공기, 풀잎에 맺힌 물 냄새,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뚜라미의 일정한 박자.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있기 때문.”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가을의 우물은 서가 사이에 숨어 있다. 손끝이 닿아야 비로소 솟아오르는 물빛의 문장들.


김포 심야서점을 운영하다 보면, 소리와 냄새 말고도 계절을 가늠하는 또 하나의 감각이 생긴다.

사람과 책.

어떤 제목이 더 오래 손에 머무는지, 어떤 문장이 포스트잇으로 벽에 더 많이 붙는지.

여름에는 속도를 높여주는 실용·라이프스타일 책이 많이 집어 들렸다.

하지만 바람이 선선해지면 서가의 중심이 이동한다.

에세이와 시, 인문·철학—오래 머물러 읽어야 제맛인 책들, 한 장을 넘기고 다시 되돌아가게 만드는 책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가을 독서는, 각자 자기 알을 깨보려는 내면의 전환에 더 가깝다.


겉보기엔 책방 주인의 일이 세상과 다소 비켜 서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빨리 로컬의 맥을 읽는다. 하루를 마감하며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사람의 표정, 문을 닫기 전 서가 앞에서 망설이는 손끝, 북토크가 끝난 뒤 가만히 남겨지는 한 줄의 메모.

그 모든 것이 동네의 현재와 내일을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가끔은 이렇게도 생각한다.


“나를 이슈마엘이라 불러라.” — 허먼 멜빌, 『모비 딕』
밤마다 우리를 부르는 수많은 이름들—그 이름에 귀 기울이는 것이 심야서점의 항해술이다.


오늘날 독립서점은 책만으로는 버티기 어렵다.

그래서 독서모임(북클럽)을 설계하고, 지정독서 프로그램과 저자 북토크를 기획하며, 함께 읽는 월간 리듬을 만든다.

누가 책방 주인이 세상사에 무심하다고 했던가.

우리는 지금 사람들이 무엇에 마음을 쓰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기록한다.

큐레이션은 안부 인사이고, 서가 배치는 대화의 문법이며, 프로그램은 동네의 호흡을 맞추는 리듬이다.

그런 마음으로 가을빛이 잘 드는 자리에 느린 책들을 앉힌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거친 계절과 시장의 파도 앞에서도, 우리에겐 버티는 근육이 있다.

그 근육은 결국 함께 읽는 시간에서 자란다.

가을은 때때로 불시에 변신을 데려온다.

점심까지만 해도 여름이었다가, 저녁엔 코끝이 서늘해진다.

마음의 계절도 그렇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해 있었다.” — 프란츠 카프카, 『변신』
우리는 그런 날을 위해 책을 펼친다.

변신의 충격을 받아낼 언어의 그릇을 미리 준비해두는 것—그것이 작은 서점이라는 방의 존재 이유다.

프로그램을 짤 때도 우리는 계절을 배운다.

자유독서의 느슨함과 지정독서의 밀도를 번갈아 깔고, 달에 한 번 저자와의 북토크로 호흡을 수렴한다.

유명세를 소비하는 이벤트가 아니라, 한 달 동안 숙성된 질문 저장소를 저자의 호흡과 공동 편집하는 시간.


낭독 20문장—즉답의 직선—해석의 골목길. 대화의 끝을 ‘다음 달 나의 실행 한 줄’로 닫으면, 독서는 비로소 삶의 방법이 된다.

그리고 그 모든 흐름을 받쳐주는 건 아주 작고 단단한 확신이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책의 가격은 보이지 않아도, 체류의 온도와 재방문 발걸음은 분명하다.


계절이 바뀌면 책방 주인도 분주해진다.

가을빛에 맞춰 서가 재배치를 하고, 지정독서의 핵심 발췌를 고르고, 질문 5개를 다듬는다.

누군가의 저녁을 붙잡아 줄 문장을 찾아 목차를 훑고 첫 문단을 소리 내어 읽는다.

결국 책방 주인은 농부와 닮았다.

책을 심고, 사람을 심고, 시간을 심는다.

한 번에 올라오지 않는 뿌리를 믿고, 너무 일찍 재촉하지 않으며, 필요한 만큼의 물과 빛을 조심스레 건넨다. 수확은 화려하지 않다.

그저 누군가의 가방 속에 들어갈 한 권, 누군가의 밤을 지켜줄 한 문장.

그리고 아주 드물게, 등을 번쩍 세우게 만드는 촉구.


“너는 너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 — 릴케, 『아폴로의 고상』
그 한 줄이 우리를 다시 책상으로, 다시 서가로, 다시 서로에게로 데려온다.


가을밤, 문을 닫기 전 서가를 한 바퀴 돈다.

자리를 옮긴 시집이 잘 보이는지, 북토크 포스터가 요란하지는 않은지, 포스트잇 벽의 빈칸은 적당한지.

그리고 낮게 중얼거린다. 계절이 바뀌면 우리도 조금 더 깊어질 차례라고.

오늘도 책을 심었다.

사람을 심었다.

이제 기다릴 시간이다—가을의 냄새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올, 당신의 한 문장을.



오늘 글에 인용된 책 6선 — 가볍게 읽는 안내

『어린 왕자』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떤 책? 사막에서 만난 소년이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일러주는 현대 우화예요.

왜 이 글과 맞나요? 계절과 서점의 리듬, ‘체류의 온도’를 말할 때 잘 어울려요.

이런 분께 어울려요: 관계의 본질과 일상의 의미를 다시 정리하고 싶은 분.


『데미안』 · 헤르만 헤세

어떤 책? 자아 각성의 여정을 상징과 신화로 풀어낸 성장소설이에요.

왜 이 글과 맞나요? “알을 깨고 나오는” 가을의 독서 무드와 딱 겹쳐요.

이런 분께 어울려요: 나를 이해하고 전환의 징후를 문장 속에서 찾고 싶은 분.


『모비 딕』 · 허먼 멜빌

어떤 책? 집념과 운명의 바다를 항해하는 거대한 서사예요.

왜 이 글과 맞나요? 심야서점의 ‘항해술’—수많은 이름과 이야기를 듣는 태도와 닮았거든요.

이런 분께 어울려요: 상징의 세계 속에서 인간의 욕망과 한계를 탐색하고 싶은 분.


『노인과 바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어떤 책? 패배와 존엄, 버팀의 미학을 보여주는 단단한 고전이에요.

왜 이 글과 맞나요? 시장의 파도 앞에서도 ‘버티는 근육’을 키우는 책방의 마음과 통해요.

이런 분께 어울려요: 짧지만 강한 문장으로 용기와 품위를 회복하고 싶은 분.


『변신』 · 프란츠 카프카

어떤 책? 어느 아침의 급작스런 변신이 드러내는 고독과 관계의 균열을 다뤄요.

왜 이 글과 맞나요? 계절처럼 갑자기 찾아오는 변화(변신)를 견디는 언어를 준비한다는 메시지와 연결돼요.

이런 분께 어울려요: 불안과 일상 사이의 틈을 차분히 들여다보고 싶은 분.


『신시집(Neue Gedichte)』 중 「아폴로의 고상」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어떤 책/시? 예술의 응시가 삶을 바꾸라고 조용히 건네는 한 편의 강력한 시예요.

왜 이 글과 맞나요? “너는 너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문장이 독서를 행동으로 이어주니까요.

이런 분께 어울려요: 짧은 시 한 편으로 하루의 방향을 미세 조정하고 싶은 분.


소모임 주소:

https://www.somoim.co.kr/5d02162e-4f44-11ef-838d-0a865d8d2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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