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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20. 2022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을 때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모두가 할 수 있는 건 아닌 일

내 오랜 소중한 친구 M, 그녀의 추천(생각해보니 지난 20년간 그녀가 내게 뭘 추천한 적은 별로 없네) 으로 이 책을 읽어 보게 됐다. 솔직히 제목만 봤을 땐 요새 시중에 많이 나오는 그런 책들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M이 이 책을 읽고 있고, 책을 읽으면서 나를 떠올렸다니 어쨌거나 꼭 읽어보고 싶어졌다. 친구는 어떤 마음으로 나도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랬을까 기분 좋은 궁금함에 조금은 설레기도 했다.


제임스 홀리스 지음, 김현철 옮김, 도서출판 길벗(2018)


책을 끝까지  덮고 나니, 다는 아니겠지만  이유를 짐작할  있었다. 얼마  우리가 아주 짧고 굵게 통화했던 내용이 책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건 아마도 "자신의 고유성을 잃어버린  살아온 , 그리고  고유성을 되찾으려는 노력" 정도로 얘기할  있을  같다.


'장녀', '엄마의 기대 및 통제' 같은 성장배경 키워드가 그녀와 나의 공통점으로 자리한다. 그녀는 내가 나름의 기록을 모아 두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만,  책의 챕터들은 그간 내가 2년의 시간 동안 블로그에 혼자 끄적여오던( 글들을 옮겨와 얼마 전부터는 브런치에 작성하고 있는) 여러 글들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었다.


  아마 '내면의 여정', '성장', '나다움'과 같은 키워드들. 순간순간 괴롭기도 답답하기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기도 했던 그 모든 시간들. 최근에는 나 자신에 대해 보다 정교하게 알아가면서 뜰채에 걸러지듯 맑아지는 부분들이 많아지고 있다. 덕분에 조금은 가뿐한 마음이기도 하고. 좌충우돌하며 쉽지 않게 보내온 시간이 전문가적 관점에서 분석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묘한 위로가 된 것은, '내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정말 뜻깊은 시간이 찾아온 것이고 아주 축복받은 일'이라는 혼자만의 생각이 조용히 확인을 받은 것 같아서였다. 그 모든 시간들을 '인정받고, 확인받는' 느낌. 나름 치열했던 내면 탐구의 시간이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사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0순위의 중요성을 갖는 일이었다는 것. 온전한 삶의 방향을 재정립하기 위해 반드시 멈춰 서야 하고 한 번은 거쳐야 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일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사회에서의 역할과 정신의 반사작용을 빼고 나면 내가 누구인지 정말로 모르게 된다. 또한 이 압박을 완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p.207)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것과 다른 무언가를 시도하는 데 따른 불안감 때문에 우리는 정신에서 홀대받는 부분에 에너지를 주고 싶다는 잠재 욕구를 무시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 욕구가 보상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말이다.(..) 전문화 과정에서 무시되고 금지당해 뒤쳐졌던 부분을 되살리는 일이다. ('같은 책', p.164)


 이 부분을 보면서  2019년에 작성했던 글 <쓸모없어도 괜찮아 - 잃어버린 감상을 찾아서(2019년 1월)> 가 생각났다.

 "곧 마흔으로 수렴해 갈 텐데.. 나는 사실 지금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 막상 생각할 시간이 주어져 내가 누구인지 생각하다 보니 정말이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고, 그런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쉽지 않다. 수시로 찾아오는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 어떤 선택이 '나다운' 것인지 사실 난 잘 모르겠다. 매번 선택이 어렵다"
                                                                                                    - <쓸모없어도 괜찮아>

 뒤이어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잘라버린 무용한 것들을 다시 되살려 보기로 결심'하는 내용으로 글은 마무리된다. 그 결심이 뭐 대단히 당당하고 확신에 차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니 근데 진짜 이래도 되나, 내가 이런 사치스러운 시간을 갖어도 되나?'와 같은,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것과 다른 무언가를 시도하는 데 따른 불안감'이 스며들어있던 꼭 그런 상태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에 가까운 그런 결심.


  저자에 따르면 '전문화 과정에서 무시되고 금지당해 뒤쳐졌던 부분을 되살리는 일'은 마흔이라는 중간 항로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찾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쓸모없어도 정말 괜찮은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꼭 그래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감상'과 '글쓰기'를 되살려 보기로 한 결심에 따라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조금씩 끄적이기 시작했었다. <공항 가는 길, 가을 그리고 인생의 '두 번째 사춘기'(2020년 6월)>, <스토너, 넌 무엇을 기대했나(2019년 4월)>, <평균의 종말, 나는 정상일까(2020년 6월)>, <콰이어트, 나 이토록 내향적인 사람이었구나(2020년 5월)> 등이었는데 이렇게 제목만 모아 놓으니 이미 일관된 흐름이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말이다.


마흔의 스트레스 증상은 후천적 성격 아래에 숨어있던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며, 다시 태어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환영할 일이다. 중간 항로는 후천적으로 만들어낸 성격과 ‘자기’의 욕구 사이에 무시무시한 충돌이 벌어지면서 시작된다. 이를 경험하는 사람은 종종 겁에 질려 “이제 내가 누군지조차 모르겠어”라고 말할지 모른다. 과거의 나를 미래의 나로 교체해야 하며, 과거의 나는 숨통이 끊어져야 한다. 그러니 엄청나게 불안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같은 책, p.29)

우리는 중간 항로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자기’의 충돌이 빚어내는 갈등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이 운명적인 충돌과 죽음-재생 과정을 겪어야 새로운 삶이 등장한다. (같은 책, p.36)

사회화된 자기인 페르소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만큼, 우리는 내면의 진실에 접근하면 외부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불안에 시달린다. 따라서 중간 항로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과 페르소나 사이의 관계가 급격하게 바뀌는 것’이다.(같은 책, p.89)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정말이지 내적 밑줄을 백번은 친 것 같다(!!). 특히 비교적 최근에 썼던 두 글 <너와 나를 돌보는 시간(2021년 6월)>, <20대가 전생 같아, 갑자기 멀미 나는 기분(2022년 1월)> 이 떠올랐다. 글 <너와 나를 돌보는 시간>에서는 이런 문장을 썼었다.

"나는 이제 서른아홉, 그런데 나도 이제야 두 살인 것 같은 기분은 뭘까"

"(..) 일종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된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타인의 인정을 받고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나 아닌 모습으로 지나치게 애쓰고, 결핍을 모른 채 결핍을 채우려 들었던. 물론 이렇게 해서 밖으로 드러난 모습, 그것도 '나'겠지."

"나는 스스로에 대해 참 무지했고, 스스로를 오해했다. 나 자신을 보다 정확하고 깊이 있게 알아가다 보니 마치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나를 알아가고, 고유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돌보는 것. 그게 지금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다."
                                                                                           - <너와 나를 돌보는 시간>

 뒤이어 이슬아 작가의 책 <깨끗한 존경>에 나온 대화(이슬아-유진목)가 인용되어 있다. "삶이라는 게 얼마 안 되었어요. 제가 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지가 정말 얼마 되지 않았어요"라는 문장. 그리고 "그 시기 이전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도 마음에 남았다고 적혀있는데, 이 문장들은 다시 읽어도 정말 꼭 내 마음 그대로다.


 <20대가 전생 같아, 갑자기 멀미 나는 기분>  그대로 나의 20대가 지금과는 아예 다른 인간, 다른 존재로 느껴진다는 기분이 들어  글이었다.  글의 핵심은 이거였다. '다시 태어난' 느낌.


그렇다고 이게 무슨  생명을 얻어 싱그럽고 신나는 기분 이런  아니라, 위의 책에서 인용한 것처럼 '과거의 나를 미래의 나로 교체해야 하며, 과거의 나는 숨통이 끊어져야 한다. 그러니 엄청나게 불안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맥락과 상통하는 그것이었다. 숨통이 끊어지고, 겁이 나고 불안해지는 .


그러니까 내가 지난 2년간 느낀 불안은 비단 처음 해보는 육아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총체적으로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불안도 함께 존재했던 것이다. 그제야 내가 느낀 불안이나 겁의 실체가 보다 분명하게 이해되었다. 뭉뚱그려 '육아'에 대한 불안이라고 덩어리 져 있던 것의 실체가 드러나니 개안한 기분이었달까.




 더불어 한 가지 늘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가면'을 쓰고 살아온 '나'는 도대체 무엇이었나. 나는 그때의 나를 어떻게 이해하고 용서해야 하는 걸까. 저자는 '잠정 인격'과 '중간 항로'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중간 항로(The middle passage)'는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한 핵심 개념인데 직접 책에서 확인하면 좋을 것 같다.   


‘잠정 인격’이란 연약한 아이가 존재의 불안을 관리하기 위해 취하는 연속적인 전략이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행동과 태도는 5세 이전에 형성되며 ‘자기 보호’라는 공통된 동기를 가지고 놀랄 만큼 다양하게 전략적으로 변화하며 정교해진다. 전쟁, 기아, 장애 같은 외부 요소도 아이의 자기 및 세계 인식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만, 주된 영향은 부모-자식 관계의 특징에서 나온다. (같은 책, p.19)

(1차) 성인기의 성격은 어린 시절 상처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일련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초기 경험과 트라우마에 대한 반사 반응에 가깝다. (같은 책, p.25)

이 시기에 우리는 ‘독립하는’ 법을 배운다. 중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마도 부모 콤플렉스에서 자신을 떼어놓는 일이 아닐까 싶다. 잎서 언급된 잘못된 자아, 그리고 1차 성인기에 획득한 잠정 정체성을 지금껏 지탱하는데 부모 콤플렉스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1차 성인기의 잠정 인격이 ‘스스로 생성한’ 것이 아니라 ‘외부 요소에 대한 반응’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기 전까지 우리는 진정 독립된 인격체라고 할 수 없다. (같은 책, p.130)


<너와 나를 돌보는 시간>에는 아이를 돌보고 여러 육아서들을 읽으며 "나의 오랜 쓴 뿌리들, 그리고 부모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한바탕 쓰라린 진통을 겪었다"라는 얘기를 적었다. 말 그대로다. 아이를 돌보면서 유년 시절의 나를 싫든 좋든 계속 대면하게 됐다. 그 어린 시절의 내가 왜 그랬었는지, 이제야 내가 나를 깨닫기도 하고.


   '잠정 인격', '잠정 정체성'이라는 개념은 지나온 시간의 나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해결되지 않은 어떤 부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몇 년을,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던, 나에 대한 용서가 가능해진 것이다. 더불어 나의 진짜 독립은 결혼과 함께 시작된 것이 아니라, 육아와 함께 시작된 것임을 깨달았다.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어 한층 더 혼란스럽기도,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인텐시브 코스가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직 그 과정 중에 있기도 하고.

 

  그렇다면 이 모든 혼란, 고통의 시간을 통해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나처럼 몇 개월이 걸리든 몇 년이 걸리든 결국 내 머리로 이해 가능한 '의미'를 찾아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지금껏 추구한 것 모두를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안정과 정체성이 제공했던 기만적인 보장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정말 신기하게도 넘치는 존재가 마음을 채운다. 그 후 우리는 머릿속의 지식(물론 이것도 때로 중요하다)에서 마음속의 지혜로 옮겨간다. ('같은 책', p.246)

내면의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하면 우리는 인격을 얻을 수 있다. 지금껏 우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 이들에게는 우리가 낯선 사람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 자신에게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스스로와 중요한 연결을 맺고 있는 한, 자신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음을 깨닫을지도 모르다. (..) 영혼의 여정이 풍부해지면 이는 적어도 세속의 성취만큼이나 우리에게 보람을 안겨준다.('같은 책', pp.251-252)

중간 항로가 겪는 고통은 보상으로 바뀔 수 있다. 얄궂게도 여기서 얻는 것은 손실을 다르게 보는 관점이다. 오래된 자아의 확실성을 포기하면 더 큰 현실로 가는 문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불멸의 존재라면,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죽어야 하는 존재인 탓에 우리에겐 여러 가지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 선택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되며 자신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p.244)


나에겐 진정 그랬다. '안정이 제공했던 기만적인 보장을 넘어서고, 신기하게도 넘치는 존재가 마음을 채우고, 적어도 나 자신에게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그래서 세속의 성취만큼이나 큰 보람을 느끼는' 그런 일. 이 모든 것이 내가 영원히 산다면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유한한 삶, 그리고 대략 반 정도 흘러온 인생 앞에서 나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게 중요한 질문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내가 '나'에게 초점을 맞추는 이 시간과 정성, 나의 성장에 집중하는 이 모든 노력에 대해 가끔 이기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것. 가족과 나의 성장은 어떻게 함께 가는 것일까? 와 같은 의문들. 이에 대한 대답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아래 내용에서 '타인'을 '남편'이나 '아이'에 대입하여 읽어보았다. 이를 토대로 어느 정도 나만의 답을 찾아나갈 수 있을 것 같다.


타인과의 밀한 관계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타인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지 않아도  정도로 자신이 스스로 충분히 발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완전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 우리가 사회에 가장 유용하게 공헌하는 길은 각자가 고유하고도 온전한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 따라서 개성화에 대한 관심은 자기도취가 아니라 사회에 공헌하고 타인의 개성화를 지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같은 , p.214)

개인의 성장이 실은 자기애적인 문제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렇지 않다. 개인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타인에게도 똑같은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각오가 되어 있는 한에는 말이다. 여기에는 힘이  배로 든다. 자신을 책임지는 능력과 더불어 자신의 상상력으로 타인의 현실을 확인하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같은 , p.111)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스스로 개성화를 이루게 해주는 것이 부모가   있는 가장  일이다(..). 자식은 부모와 다르며 부모에게 어떤 의무도 지지 않은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 자식은 부모를 돌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 자식을 통제하거나, 자신이  이룬 삶을 자식이 대신 살게 하거나, 우리와 똑같은 가치체계를 자식에게 강요하는  사랑이 아니다. 자기도취에 불과하며 자식의 삶을 방해할 뿐이다. (같은 , pp.138-139)

 

이 책은 생각보다 넓은 범위의 내용을 아주 깊이 있게 담고 있었다. 부모와 나의 관계, 나와 자식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배우자와의 관계.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에서 인용한 부분 외에 내가 나만 보는 파일에 따로 정리해 둔 내용이 10페이지가 넘어간다. 오히려 진짜 중요한 내용들은 채 인용하지 못한 부분들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내용들을 진작 알았으면, 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난 몇 년간 물밑에서 발장구 치며 치열하게 탐구하고 고민하고 실천한 그 작은 노력들은 살기 위한 것이었고, 결국 혼자 오롯이 겪어봐야만 알 수 있는 일들이었다. 다만, 이 책을 통해 지나온 시간을 명료하게 정리할 '언어'와 '논리'를 발견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책을 추천해 준 M에게 고맙고, M과 나 사이에 있을 그(God)의 섭리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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