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한 시간과 고유성의 회복
6월에 책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두 달 전부터 보다 건강한 식사를 위해 다시 노력 중이다. 한창 식사에 신경을 쓰다가 더위에 몸이 지치기도 하고 육아 스트레스가 평소보다 커지면서 저절로 배달 및 외식 비중이 높아졌다. 그러던 중 시아버님께 건강 이슈가 생겼고, 가족력이라는 키워드가 수면 위에 떠올랐다. 당뇨 및 암과 관련된 것이기에 남편의 식습관이 걱정이 됐다.
다시 고삐를 잡아 건강한 식사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에 따라 시간과 비용을 보다 더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관련 서적을 새로 주문하여 읽기도 하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책들도 다시 살펴봤다. 그중 하나가 헬렌 니어링의 책이었고, 책을 다 읽고 나니 책날개에 시리즈 도서가 소개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그 책이 바로 <슬로 라이프>다.
제목이 크게 매력적이게 다가오진 않았다. 현재의 나의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것이, 뭐랄까 다른 것들을 추구하다 보니 '슬로'해진 것이지, '슬로' 자체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슬로'라는 표현이 전면에 있는 것 자체가 내게도 약간의 저항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니 그 일말의 '저항감'의 기저에 깔린 것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됐다.
그럼에도 책을 주문했던 건 예전보다는 훨씬 느려진 나의 삶의 방식이 꽤나 마음에 들고, 이러한 삶의 방식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고찰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이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내 삶의 이론적 배경이나 철학적 배경을 보완할 수 있고,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건 내 삶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이 책은 '쓸모없음'의 "쓸모"에 대해 반복적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쓸모없어도 괜찮아'가 아니라 오히려 '꼭 쓸모없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라는 관점의 이야기들.
목적지 없는 산책이나 빈둥거리는 시간이 취미나 노동력의 재생산과 같은 '목적'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방식 그리고 본질적인 시간의 사용 방식으로서 목적 없이 존재한다는 것. 효율과 목적성에서 벗어난, 말 그대로 '쓸모없고 비효율적인, 비생산적인' 느린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들이 계속 나온다.
아마 이런 문장이 내 귀에 들려오는 건, (물론 지금은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내가 목적 없이 노는 시간이나 빈둥거리는 시간을 잘 못 견디고, '가만히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죄책감을 느끼는'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뭐랄까 시간이나 동선은 효율적이 어야만 하고, 비는 시간에는 뭐라도 해야 남는 느낌 같은 것.
하지만 이런 시간 사용이 나를 더 잘 살게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그 부지런함으로 인해 쉼 없이 움직였던 시간들은 내게 여러 면에서 독이 됐다. 물론 이로 인해 얻은 것들을 전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득과 실을 놓고 따져본다면 결과적으로 실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 무엇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완전히는 아니어도 속도를 많이 늦춘 현재의 내 모습이 훨씬 마음에 든다. 쉼표의 시간이 나 자신을 점차 되찾게 해 주어서 흡족하다. 무엇보다 예전보다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감사한 일이다.
문화인류학자 다케무라 신이치는 인간의 본질은 ‘아이’라고 지적한다. 평생 아이로 지내면서 언제든 새로운 자극과 학습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가소성에 바로 인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이제까지 ‘생산적인 어른’만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잘못 믿어온 것은 아닐까. 이러한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우리가 이제까지 성가신 것으로 여겨온 늙음이나 어림이 언뜻 보기에는 비생산적으로 느린 시간과 더불어 풍요로운 가능성으로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될 것이다.(p.193- 194)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에서만큼은 아이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바로 놀이이기 때문이다. 놀이는 바로 일상의 현실 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합목적성으로부터 자유롭기에 빛나는 것이다. ‘헛되기’ 때문에 비로소 충실해지는 것이다.(p.201)
노는 즐거움, 자신이 어딘가 목적지로 가는 길 위에 있다는 생각에서 해방되어 지금을 사는 자유, 그저 거기에 존재함으로써 얻는 기쁨을 인정하자. 그 역시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한 일이라 여기면서. 단순한 취미나 여가에 속하는 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으로서, 본질적인 시간의 사용 방식으로서 말이다. (p.22)
관련하여 이 책의 근면-게으름 꼭지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일은 무가치고 비효율적으로 것으로 여겨지는, 그러니까 쉬는 것과 노는 것은 그 자체로는 시간 낭비일 뿐이고, “노동력의 재생산이나 오락 산업의 번영을 위한 것일 때라야 비로소 가치가 있다(p.32)"는 부분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그간 나의 쉼에는 '내일 더 잘 일하기 위해서'라는 목적과 명분이 항상 있었고(그래야 마음이 편했고), 이런 의미 부여 없는 "그냥 쉼"은 스스로 허락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로그에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첫 글의 제목이 <쓸모없어도 괜찮아>였다. 사실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 '괜찮지가 않아서', 무용한(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보내려는 결심이 막상 두려워서, 괜찮아지려고 쓴 글이었다.
확신까지는 없었지만, 지금 선택하여 가는 이 방향이 틀리지는 않을 거야라는 아주 가느다란 믿음은 붙잡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정말 괜찮았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그 무쓸모라는 공백이 나를 살려주었다.
책의 표현을 빌려 '머무는 것'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난 '가만히 있는 것'으로 읽었다. 몸이 먼저 급하게 움직이려는 순간에 잠시 심호흡하고 '일단 가만히 있어보자'라고 의도적으로 연습한다.
순간적으로 눈에 보이는 뭐라도 하는 편이 가만히 있는 것보다 쉽다. 하지만 뭐라도 한 것에서 오는 순간적인 안심이나 만족이 반드시 더 좋은 결과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시대는 ‘움직이는 일’에 매혹되어 잇다. 그리고 더 빨리 움직이는 것만을 생각한다. 고도의 기동성이 마치 성공의 징표라도 되는 듯 말이다. 더 빨리 도착하고, 더 빨리 떠나는 데 노력을 집중하고 있는 사이, 우리는 ‘머무는 일’의 가치를 잊어버렸다. (...) ‘함께 사는 일’ 또한 일종의 머무는 기술이자 지혜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함께 사는 일’은 점점 더 멀어진다. ‘함께 사는 일’이 인생의 본질적인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시 한번 ‘머무는 일’을 배워볼 필요가 있다. (..) ‘머무는 일’은 시간이 걸린다. ‘함께 사는 일’은 더욱 시간이 걸리고 성가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시간이 없다면, 과연 인생을 살아볼 만한다고 할 수 있을까.(p,153)
수많은 젊은이가 ‘더 빠르게, 더 크게, 더 강하게’라는 산업사회의 신화가 깨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단지 아직은 그것을 대체할 만한 다른 이야기를 자신들이 만들어갈 수 있을지, 혹은 만들어가도 좋을지 확신이 없는 것이다.(p.60)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나눈 이야기가 잡담으로 분류되고, 수험공부나 취직 등 실리로 이어지지 않는 공부는 잡학으로 치부된다.(p.65)
삶의 보람이란 가족 간의 단란함이나 공동체와 함께 누리는 즐거움, 혹은 친구나 연인과 보내는 느긋한 - 생산성과 효율성의 관점에서 보면 무익하게만 보이는 - 시간 속에 있는 게 아닐까. (p.69)
올해 1월에 작성한 "새해 목표(그러니까 '나다운 삶' 그게 목표)" 중에 세 번째 꼭지는 '느긋한 일정, 느긋한 일상'이었다. 바쁘게 계획하고 움직이기보다는 가족과 함께 오래 머물고 천천히 움직이는 가만한 시간을 상상했다. 물론 성격이 기본적으로 좀 급한 편이기도 하고, 효율성에 집착하는 습관이 하루아침에 제거될 수는 없다.
그래도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을 돌이켜보면 전체적으로는 꽤나 느긋해진 편이다. 계획에 변수가 발생하거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나는 화나 짜증이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줄었다. 이건 체력의 증진과도 연결되는 거 같고.
내가 브런치에 쓰고 있는 글이나 읽고 있는 책들, 공부하고 있는 것들은 위에 인용한 것처럼 수험공부나 취직, 수입 등 실리로 이어지지 않는 '잡학이나 잡공부'로 치부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리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에서 이것이 내게 갖는 가치가 있다. 그냥 쓰고 싶어서, 그냥 읽고 싶어서, 그냥 알고 싶어서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고 다듬는 이 시간이 무엇보다 나를 나답게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구상의 생명체가
각각의 고유한 시간을 살고 있다는 생각으로 돌아가야 한다.
개인적 차원에서 ‘분발하지 않기’란
각자의 개성과 특성, 페이스에 맞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고유성'이나 '나다움'과 같은 단어는 최근 몇 년간 내 삶의 키워드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손이 가고 눈이 가고 마음이 가는 것이 그런 것이었다 보니 자주 관련 내용을 쓰게 되었다.
시작할 때는 전혀 상관없어 보였던 '달리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 자신의 페이스에 맞춰 달리고 살아가는 것, 나의 개성과 특성을 되찾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커다란 큰 주제로 지금의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슬로 라이프"는 여유롭고도 느긋하게 보내는 노후 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활기차고도 역동적인 생활방식(p.224)’이라는 말이 와닿았다.
아이의 하루를 함께하며 생각한다. 아이는 활기차고 역동적이게 매일매일 자신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실현한다. 물론 내가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그 비생산적으로 느린 시간을 촘촘하게 함께하면서 나도 이제야 비로소 체득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어쩌면 겉으로는 가장 덜 화려하고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이 시간이, 사실 성인이 된 후의 내 삶에서 가장 생기 있고 역동적인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실현한다는 측면에서 그렇고, 나다운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일군다는 점에서 그렇고. 가장 비효율적인데 제일 효율적인 것 같기도 한, 마치 '나'라는 여정의 '돌아가는 지름길'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