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력서를 써 보았는가

나는 누구고, 어떤 삶을 살아왔고,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by 별통

한 직원 모집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경기지역의 중소도시에 있는, 제법 규모가 큰 공익재단이었다. 평소 사회공헌과 관계된 공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특히 어려운 이웃이나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 그중 하나였다. 나이가 들어 반드시 ‘저지르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저지르고’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성공 여부를 떠나 기필코 해야 할 일이라고 수없이 되 뇌였기 때문이다.

사이트에 들어가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보니 준비서류가 적지 않았다. 입사지원서는 기본에다 별도로 이력서를 작성해야 했다. 곰곰이 생각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고개가 긍정적인 답을 했다. 좋다. 일단 지원서부터 작성하기로 했다.

먼저, 나이를 써넣는 빈칸에서부터 한참을 머물러야 했다. 내 나이가 몇 살인가? 금방 숫자가 답으로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몇 번의 셈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 나이가 나타났다. 놀랬다. 유수 같은 시간의 흐름에 놀랐고, 살아온 햇수를 돌아보니 가볍지 않은 무게에 놀랐다.

이내 아내는 몇 살인지, 어머니의 연세는, 아이들은 또 몇 살인지,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나이테로 관심이 옮겨졌다. 그야말로 나이를 돌아보지 않고 살아온 삶이었다. 경제적 가치가 있는 숫자에만 몰입해왔던 것은 아닌지 급 반성 모드가 찾아왔다.

학력 칸을 채워나갔다. 배움의 시점이 아득하다. 끝만 저 멀리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의 배움이 없었다. 자기 계발이 없었다는 거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급변하는 만큼 미래의 삶은 불확실성에 갇혀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일할 수 있는 시간뿐만 아니라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사라진다. 그래서 배워야 한다. 기술은 아니더라도 새로운 기능과 문화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이라지만, 배움만큼은 때가 없다. 왜 그것을 몰랐던가. 다시 써보는 이력서가 나를 깨닫게 했다.

다음은 가족관계를 쓸 차례다. 현생(現生) 그대로를 옮기면 됐으니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나를 멈칫하게 한 것이 있다. 바로 ‘가족’으로 생각이 커졌기 때문이다.

아내와 함께 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일본 영화 ‘어느 가족’의 여파였을까. 영화는 남남이 모여 가족을 이루어 생활하는 이야기다.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 어머니는 세탁공장 노동자, 전남편의 아들로부터 생활비를 뜯어내는 할머니, 유사 성행위 업소 노동자와 가게에서 좀도둑질을 하는 자녀들. 연금생활자인 할머니의 집에 얹혀사는 가족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형태의 삶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물질적 궁핍과 법을 지키지 않는 행위가 그렇다. 영화 ‘어느 가족’은 혈연 유대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서로의 필요에 따라 함께 살아간다. 녹록지 않는 생활을 하면서 줄곧 웃음과 대화가 이어지고 함께 여행도 떠난다.

할머니는 죽음을 앞두고 ‘고마웠어요’라고 혼잣말을 한다.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쇼타’라는 이름을 지어준 아빠는 아들 쇼타에게 “아빠는 이제 아저씨로 돌아갈게.”라고 말한다. 국가의 통제시스템에 의해 가족들은 뿔뿔이 헤어지면 서다. 쇼타는 마지막으로 아빠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시설로 되돌아간다. 쇼타가 버스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아 멀어져 가는 아빠를 계속 바라본다. 그리고 “아빠”라고 중얼거린다.

‘내게 가족은 어떤 존재인가?’ 쉽게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詩)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든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정말 고마운 것이다//.

김사인의 시 ‘조용한 일’이다. 가족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소중함을 느껴야 한다. 공기 같아서 느끼지 못하는 것이 가족이다. 상처를 서로 주고받는 사이지만 또 말없이 이해하고 그냥 곁에 있는 것이 가족이다.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가족의 존재를 생각해보는 것. 바로 이력서의 힘이다.

이제는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야 한다.

먼저 이야기 하나. 고대 그리스 아르킬로코스의 우화 ‘여우와 고슴도치’가 있다. 자유주의 사상가 이사야 벌린은 ‘여우와 고슴도치 이론’으로 접근했다.

세상 사람들은 고슴도치와 여우로 크게 나뉜다. 여우는 고슴도치를 공격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꾀를 가지고 있다. 고슴도치는 여우를 이기는 방법은 언제나 같다. 몸을 둥그렇게 말아 공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고슴도치 유형의 인간은 모든 것을 하나의 비전에 연관시키는 사람이다. 여우는 모순되기도 하고 불완전하기도 하지만 현실의 다양한 면을 다루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사야 벌린은 책에서 “톨스토이는 ‘고슴도치가 되고 싶었던 여우’였다”라고 표현했다.

자기소개 글을 써나가기에 앞서 ‘나는 어떤 유형인가?’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고슴도치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직장 생활 내내 한 우물을 팠던 것이나 정해놓은 원칙에 자신을 가둬놓고 ‘지켜야 한다’만을 외쳤던 것이다. 여우는 실용적이고 고슴도치는 이상적이다. 여우는 자꾸 변해서 현실에 잘 적응한다. 고슴도치는 큰 원칙을 정해놓고 지킬 뿐이다. 방향을 바꾸지도 않는다.

심리학자 필립 테틀록은 “여우는 이런저런 상황 변화를 통해 늘 의견과 전략을 수정하니까 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 반면 고슴도치는 자신의 방향을 한 길로 가기 때문에 잘못 들어서면 답이 없다.”라고 설명했다.

이사야 벌린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고슴도치는 단 하나의 중심적 가치에 모든 것을 갖다 붙이기 때문에 맹목적일 수 있는데 변덕이 심해도 다양한 사고를 하면서 환경에 적응하는 여우가 더 세상을 바꾼다.”

나는 분명 고슴도치였다. 그러다 보니 자기소개 글은 시종일관 비슷한 일뿐이었고, 성과 역시 같은 영역에서만 나왔다. 재미가 없는 평범함을 넘지 못한 자기소개 글이다. 평생을 전력투구한 일이었지만 비슷비슷할 뿐 색다름이 없다. 여우가 아니라 고슴도치로 살아왔다.

여우를 번번이 이긴다 해도 과연 고슴도치의 삶은 재미가 없다. 여우와 고슴도치 가운데 누가 더 옳은 삶인가를 따질 수 없다. 각개 장단점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다. 바로 창의적인 삶이다. 고슴도치처럼 온몸을 공처럼 둥글게 말면 그뿐인 삶이 아니라 이것저것 해보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삶이 훨씬 경쟁력 있고 가치가 있다. 자기소개는 고슴도치와 같은 삶으로 일관된 기록일 뿐이다.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력서 작성은 끝이 났다. 응시의 자신감을 다시 한번 측정했다. 승이냐 패냐? 결론부터 말하면 패다.

원서 접수를 미루다 마감일 하루를 앞두게 됐다. 후배의 장인상 소식을 접했다. 반드시 가봐야 할 자리였다. 해남 땅끝까지 내려가 조문을 하고 오니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우편접수는 물론 방문접수까지 불가능한 마감시간도 지나갔다.

심리학자 닐 로스는 후회를 ‘한 일에 대한 후회’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로 구분했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래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정당화할 수 있어서다. 하지 않는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래간다고 한다.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미지의 변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이력서를 썼으나(한 일) 원서는 접수하지 않았다(하지 않는 일). 그러나 전혀 후회가 없다. 오히려 이력서를 다시 써봤던 행위가 내게는 큰 축복이었다. ‘나는 누구고, 어떤 삶을 살아왔고,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수없이 고민하고 찾아볼 수 있는 값진 경험의 기회였다. 몇 년 후 나는, 다시 나의 이력서를 써볼 생각이다. 설령 지원할 곳이 없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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